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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 Jul 22. 2021

파랑 없는 파랑 집에 도착하다

집이 없는데요??

강릉으로 돌아온지 5년 차, 이 곳에 있다보면 친구들에 관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나는 나도 일정이 있는데, 아니 일정이 없어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데, 나의 시간과 의사를 고려하지 않는 방문 통보의 당황스러움. 그리고 내가 먼저 초대를 했음에도 여차저차 관광지에 사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고려하느라, 오가는 길에서 느낄 피곤함을 미리 느끼느라 그저 '언젠가' 만나자 말하고마는 아쉬움.


그러나 파랑은 정말로 왔다! 오프라인에선 이름도 잘 모른 채 지나치고, 코로나 이후에는 줌Zoom에서만 몇 번 만나 이야기하고, 그리고 인스타그램에서 서로 좋아요를 얼마간 눌러주다가, 내가 같이 온라인 모임을 하던 여러 뉴먼들에게 '강릉 오세요, 제가 이제 시간이 많아요' 라고 했을 때 '그럼 저 혼자라도 가지요~' 했던 파랑. 그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정말로 강릉에 와준 사람이었다.


강릉은 버스나 택시로 이동하기가 꽤 무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강릉역까지 파랑의 기차 시간에 맞춰 앞으로 갔다. 인스타그램으로 DM만 하다가 파랑이 강릉 도착에 임박해 급히 알려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근데 무슨 옷 입으셨어요??' 하고 물었다. '어~~ 아주 눈에 띄는 옷이요?'이라고 답한 멋진 파랑이 정말로 조금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실물 파랑이 내 차 옆자리에 탔다! 나는 속으로 와 이게 인터넷 그.. 인터넷 친구랑 번개(죄송) 하는 그건가보다!!! 하고 막 어색하면서도 신이 났다.


그렇게 하루 만난 파랑, 같이 바닷가에서 그네를 타며 발을 굴린 파랑, 솔밭을 몇 시간동안 걷고 다시 ktx역으로 쏙 들어가 사라진 파랑.  짧은 시간 다녀간 그 날 파랑의 마음에 무엇이 남았는지는 모른다. 돌아가기 전 파랑은 내게 혹시 다음달 쯤에 일주일 정도 집 바꿔 살아볼래요? 했고 우리는 한 달 뒤에 정말 그렇게 했다. 어떻게 집이라는 공간을 그렇게 한 번 만난 사람과 바꿔살 수 있느냐고 다들 궁금해하는데 그냥 그게 다다. 어차피 내 집만 내어주는 게 아니고 나도 같은 기간 그의 집에서 지내니까.


그렇게 한 달 뒤, 비슷한 시각에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ktx를 타고 파랑과 나는 '탔습니다~', '저도 지금 출발했어요~' 하고 인스타그램 DM을 나눴다. 혹시 정확한 집 주소하고 집 비밀번호 어떻게 돼요? 하고 가는 도중에 물어보고... 우리 이렇게까지 허술해도 괜찮은걸까 그제서야 생각해보는 척 하면서. 그렇게 캐리어 하나를 드르륵 끌며 도착한 서울. 그 전에는 늘 시간에 맞춰 내려가기 바빠 허둥지둥 볼 일을 보러다니기 바빴는데, 이번엔 며칠이나 숙박비 걱정 없이 머물 집이 생겼으니 발걸음마저 여유로웠다.


집이 없는데요??


지하철 역을 나와 파랑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 조금쯤 보물 지도를 따라가는 여정처럼 느껴졌다. 파랑 없는 파랑 집에 살러 내가 간다! 하고 '신나는 여행' 카테고리의 BGM들을 들으면서 파랑이 보내온 집 주소를 향해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걷고 또 걸을 때 쯤...? 아닌데 여긴 집이 없는데? 그냥 가파른 언덕인데? 나는 다급하게 우리 집에 먼저 도착해 '집이 좋네요~' 하고 메시지를 보내온 파랑에게 '근데 주소가 여기가 맞아요??? 집이 없는데요??' 하고 물었다.


겨드랑이에서 조금 땀이 나기 시작했다. 얼른 읽어라, 얼른 읽어라, 하면서 DM창을 뚫어지게 보는데 다행히 곧 보낸메시지의 상태가 '읽음'으로 바뀌었다. '저 겨땀 나기 시작했다구요!!' 하는 내게 메시지에서마저 물결이 가득한 파랑은 '아~~~ 전화번호가 없는데~ 전화번호 좀 주세요~' 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파랑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전화번호도 없는 사람하고 집을 바꿔 사는거에요?' 물었고 파랑은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에이~ 뭐~~~ 좋은 사람이시겠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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