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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 Oct 17. 2021

애인 있어요

누군가에게 나는 '한남 욕하면서도 한남 사귀는 헤녀'다.


이 짧은 글에는 '애인'이라는 말이 꽤 많이 나올 것이다. 듣기 싫겠지만 어쩔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남의 연애 이야기를 읽기 싫어한다. 물론 나도 그 중 하나다. 남의 연애 이야기라... 친구가 연인을 욕할 때면 남의 애인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해봐야 좋은 일도 없는데다 그 상대가 남성일 경우 눈앞이 아찔하다. 좋은 말을 하면 차라리 낫겠지만 그렇구나... 말고는 모르는 타인에 대해 달리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너무 내밀한 사진 같은 걸 볼 때면 마음이 한없이 곤란해진다. 문제는 내 애인도 남자다.


한번은 친한 친구가 자신의 남자친구와의 잠자리에서 일어났던 황당한 사건에 대해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너무 어이없게 웃긴 상황이라 헐 대박, 미친 거 아니야, 하면서 웃고 넘어갔었다. 그러다 우연히도 어느 날 그 남자분과 만나 이야기를 나눠야 할 일이 생겼다. 어른스럽게 참아야 했겠지만 머릿속에서 친구가 했던 말이 자꾸만 재생됐다. '아니 걔가 갑자기~ 하는 거야~ 어이없지 않냐?' 이거 좋지 않네. 어쨌든 이 사람도 인격이 있는데. 성별을 바꿔보면? 내 애인이 자신의 친구들에게 나와의 속사정에 대해 떠벌이는 상상만 해도 눈을 질끈 감게 된다.


때론 애인의 안부를 먼저 묻는 친구들도 있다. "너는 왜 남자친구 안 보여줘? 왜 얘기 잘 안 해?" 그의 성별을 숨기고자 한 건 아니지만 나는 '남자친구'라는 말을 하는 게 썩 탐탁지 않은 기분이다. 남자친구'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자칫 남성과의 연애를 전시하는 것으로 비칠까 고민이다. 남자에 대해서는 되도록이면 언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고 싶지도 않다. 한때는 나도 그들에게 무척 속하고 싶기도 했지만, 난 분명 '4B'가 아니다. 그렇다고 레즈비언도 아니다. 그럼 정치적 레즈비언 하면 되잖아! 누가 말했다. 아닌데. 그건 아닌데...


어딘가에서 '애인'이란 말을 보고 이거다 싶어 그때부터 그를 애인이라 불러왔는데, 이를 두고 나의 한 레즈비언 친구가 말했다. 그 애인이라는 말마저 헤녀(그가 나를 자꾸 이렇게 칭해서, 나는 그를 레녀라고 부른다)들한테 빼앗기는 기분이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가, 그럴 수도 있나, 이해하려 할수록 점점 더 나의 연인에 대해 말하는 일은 어려워졌다. 나는 물론 한국남자 일반에 대해 전혀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나는 '한남 욕하면서도 한남 사귀는 헤녀'다.


이런 얘길 듣기도 했다. "난 아직도 이해가 안가, 네가 남자 만나는 게..." 이때 '남자'라는 말 앞에는 대놓고 표현되지 않았을 뿐인 수식어가 굉장히 생략돼 있다. 때론 삼단논법으로 질문 아닌 질문을 받기도 했다. "너 한남 싫어하잖아" "그렇지" "근데 너 XX 사귀잖아" "그렇지" "XX 한국 남자잖아" 맞는데. 그건 맞는데... 딱 부러지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건 분명 '한남'을 싫어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인데. 그럼 또 질문. "한남에 예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네 남자친구는 다를 거라고 생각해?" 물론 이럴 때 "근데 제 남자친구는 진짜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라고 말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도 않다.


판단 당하고 싶지 않다. 나도 어느 한 기준 안에 딱 떨어지게 속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어. 그렇지만 나는 여러 가지 모순점들이 섞여있는 사람이고. 어떤 잣대로든 판단당하기 시작하면 도저 완벽할 수 없으리란 것을 안다. 요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식사를 챙기지 못할까 염려한 애인이 식사거리를 사들고 집에 왔다. 그가 내게 힘들어 보여서 마음이 아파, 괜찮냐고 물어보았을 때에는 왠지 모를 안도감에 눈물이 쏟아졌다. 이럴 때 애인은 꼭 엄마 같다. 나는 가끔 이런 순간들에 대해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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