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 세상은 내게서 몹시 멀리 있는 것 같다
대학 시절 나는 가끔 점심을 두번씩 먹었다. 친구와 점심을 먹고 헤어졌는데, 다른 친구가 같이 점심 먹자고 연락이 오면 먹었다고 말을 못했다. 미안, 다음에 먹자 말하는 것보다 나중에 저녁을 조금 먹지 뭐, 하는 게 편했다. 사람을 한번 좋아하면 끝까지 좋아했다. 미련스럽지만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내 나이조차 잘 모르는 친부도 나의 그런 성향만큼은 알았는지, 다니던 고등학교를 자퇴하겠다고하자 대번에 혹시 친구 잘못을 대신 덮어쓰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그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했는데 그 후로도 참 다양한 사람들이 내게 네 것이나 챙겨, 남 주지 말고, 그런 조언들을 했다.
취준생 시절 자주 가던 과일 가게에 들러 오늘은 자두가 얼마예요 물었을 때, 사장님이 대뜸 너무 착하게 살지 좀 말라고 했다. 세상 살면서 너무 그래도 안 좋아요. 내가 전부터 말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뭘 착했지? 싶었지만 되물을 정도의 뻔뻔함도 없었다. 첫 직장에서 성미가 사나운 과장님과 다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 식당 아주머님이 과장의 심기를 건드려 언성이 높아진 적이 있었다. 놀란 나머지 바닥에 물을 살짝 엎었었는데 그 상황에서 휴지 좀 달라고 말하기가 어려워 조용히 양말로 물을 닦았다. 그 때 문득 나를 돌아본 과장이 갑자기 짜증을 냈다. 얘 하는 것 좀 봐라 지 양말로 바닥 다 닦고 앉았네!
어느 부서로 가든 당연하다는 듯 모든 일들이 내게로 쏟아졌다. 그걸 니가 하지 그럼 누가 하냐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친구에게 혹시 내 이마에 호구라고 적혀있는 건 아닌지 봐달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팀장이 내가 통화하는 소릴 듣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무슨 시의원 나가려고 준비해? 착한 척 하려고 환장을 했나. 니가 그 일 다 껴안고 한다고 일 잘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고선 청내 게시판에 본인의 이름으로 '주제의 힘겨운 하루'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주제 씨가 너희 직원 여러분들 덕분에 집엘 못 가고 있으니 앞으로 자기 일은 자기가 좀 하라는 내용이었다.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해당 게시글은 천 건 이상의 조회수를 올렸다. 모르는 직원들까지 나에게 꼴값을 떨고 있다고 했다.
회식을 하고나면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자처한 상사들이 문득 사랑한다고 했다. 입을 맞추려하거나 한번만 안아주면 안 되냐고 했다. 어느날은 회사 사수가 집 앞 화단에 숨어있는 걸 발견했다. 출근해 복도를 걸을 때면 순간순간 눈앞이 노래져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웠다. 여자 선배들에게 조심히 마음을 털어놓으니 이런 말해봐야 너만 손해라고 했다. 한결같이 그랬다. 그냥 대꾸를 하지마. 싫다고 똑바로 말 해.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 하지 말고... 누나가 변호사라는 한 선배가 자기 누나에게 가보라고 재촉했다. 상담료는 얼마인지, 뭘 사가면 좋을지 묻자 그런 게 어딨냐고, 절대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네가 너무 당하고만 사는 것 같아 보기가 딱해 그런다고 했다.
변호사님은 몇마디 나누자마자 하여간 이 변태같은 새끼들 누울 자리 보고 뻗는다니까. 그쪽 딱봐도 엄청 순하네요. 그놈들 주제 씨가 아무 말 못할 거 아니까 주제 씨한테 스트레스 푸는거예요. 우선은 강하게 마지막 경고 하고, 정 안 되면 형사 신고하는 수밖에 없지 뭐. 고소했을 시에 제가 변호사님을 선임하면 되나요? 했더니 그가 정말 딱하다는 얼굴로 아니 변호사는 그쪽이 선임하는거고… 본인은 형사님을 만나는 거고. 했다. 그날 밤 사수에게 '너 걔랑도 사귀냐? 걸레같은 년'이라고 문자 메시지가 왔을 때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변호사 상담 받았습니다. 한번만 더 그러면 고소장 접수합니다' 라고 적고 있을 때 변호사 누나를 소개해준 선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누나가 오늘 너 보더니 혹시 우리 가족하면 안 되냐고 하네.. 나도 너같은 스타일 진짜 좋아하거든...
가끔 마음속으로 그 날의 과일가게 아저씨에게 되묻곤 한다. 아저씨. 그렇게 안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저도 정말 이렇게 살기 지겹거든요… 이제는 착하다는 말, 착한 줄 알았는데 실망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뜸 과민반응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주 내게 무례하다. 관계가 깊든, 얕든. 공평하게도 선을 넘는다. 나말고 다른 사람들에겐 내보인 적 있었을까 싶은 본모습을 불쑥 쏟아내기도 한다. 그럴 때 세상은 내게서 몹시 멀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몇번이고 무례를 무례로 되갚지 않기를 선택한다. 악다구니 치거나 바닥의 얼굴을 꺼내들지 않는다. 여전히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아직도 나는 사랑이 헌신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