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동안 8번 이사한 이야기

흥미롭지만 안타까운 연대기 by 유자까

by 유유히유영

부동산 광풍인 시대에 살고 있다. 집 한 채 마련하기 위해 사람들은 전쟁을 치른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은행 빚을 내서라도 번듯한 34평 아파트에 사는 게 인생의 답인 것만 같다. 평생 빚에 묶여있을지언정 아파트 없인 못 살겠다고 외친다. 30년 동안 갚아나갈 생각을 하면 답답하기도 하지만, 모두가 비슷한 선택을 할 때 나만 “아니오”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대체 집이 무엇이기에 내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하지?”
“우리에게 집이란 무슨 의미일까?”


잠시 멈추어 서서, 질문했다. 그리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고민의 과정을 이 글에 고스란히 담았다. 안타깝지만 다채롭고 흥미진진한 이사 연대기를 한 번 살펴보자.


우리 부부는 2012년에 결혼해서, 지금까지 일 년에 한 번꼴로 이사했다. 9년 동안 거주지를 8 번곳이나 옮겼다. 누가 보면 참 안 됐다고도 할 수 있는 삶이다. 요새 같이 부동산이 들썩이는 시기에, 자주 이사하는 우리가 얼마나 안타까워 보일까 싶다. 반면, 몇몇 사람은 우리 이사 스토리를 아주 흥미롭게 여긴다. 특히 부동산에 초집중하고 있는 30·40세대 친구들에게 우리 부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처럼 신기하게 느껴지나 보다.


신혼집은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다. 2년 3개월, 가장 오래 머문 공간이다. 12평 좁은 집이었지만, 신혼이라 행복했다. 기억에 남는 부부 싸움도 대부분 이곳에서 했다. 다음으로 경기도 남양주 별내동에 머물렀다. 전셋집이 1억 5,000만 원이었다. 무려 5,000만 원이나 대출을 받아야 했다. 복층도 있고, 집이 매우 마음에 들었지만 9개월 만에 이사해야 했다. 이유는?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기 때문이다.


삼전동 하우스. 우리의 첫집. 그때부터 함께하던 어린 리앙이가 기억에 남는다.
별내동에 잠시 머물렀다. 느낌은 그렇지 않지만, 가장 짧게 지냈던 공간이다.


2016년 새해가 밝고, 며칠 지나지 않아 뉴욕으로 향했다. 두 달간 하숙하면서 집을 알아보고, 1년 계약으로 아파트에 들어갔다. 집주인이 공사를 하느라 시끄러울 것이라며, 집주인이 월세를 200달러나 할인해 주었다. 정말 기뻤다. 그래도 한 달에 1,700달러나 했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나에게는 터무니없는 가격이었지만, 반지하를 제외하곤 가장 싼 집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집에서 1분 거리에 맨해튼 시내까지 갈 수 있는 기차역이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뉴욕에서 3년 정도 지낼 계획이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1년 만에 돌아왔다. 부모님은 쌍수를 들고 반겼다. 뉴욕에서 지내는 동안 부모님이 한번 방문했는데, 그때 본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우리가 살던 뉴욕 플러싱 지역을 경기도 양평 같다고 평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웃었지만, 실제로 집 앞에 반딧불이가 날아다닐 정도였으니 더 말은 않겠다. 아내가 꿈꾸던 전원생활을 뉴욕에서 한 느낌이다. 지금도 가끔 양평에 갈 때면, 거실 창문에 어른거리던 반딧불이 이야기를 나눈다.


미국에서 지낸 1년이 꿈같다. 1년 동안 일하느라 바빴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추억을 쌓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지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머물 집을 찾기 어려웠는데 단번에 해결할 수 있어서 좋았다. 고양시 마스코트가 고양이인데, 집주인들도 반려동물에게 열려 있는 모양이었다. 근처에 동물병원도 많고, 낮에 보러 가니 조용하기도 했다. (라페스타 근처였는데, 이사하고 나서 밤은 정말 북적북적한 동네라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보증금 500만 원, 월세 50만 원이었던 복층 오피스텔이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사했다. 다음으로 옮긴 장소는 바로 옆에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방이 무려 2개고, 거실과 주방이 넓었다. 고양이들이 뛰어다녀도 괜찮은 장소였다. 보증금 4,000만 원에 월 50만 원이었다. 보증금이 조금 비싸도 이사할 만한 집이란 판단이 들어 이사했다. 아내와 나는 이 집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지금까지 살았던 집 가운데 도시 생활자로서 가장 큰 만족감을 주었다. 큰일이 없다면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이었다.


무척 아쉽게도 이사한 지 1년 만에 집안에 일이 생겼다. 작게 생각하면 작고, 크게 생각하면 큰일이었다. (자세히 소개할 수 없는 일이라 설명은 생략하겠다.) 아내는 단번에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빠르게 결단하는 아내를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엔 정말 빨랐다. 나도 결정해야 했다. 그렇게 하남시로 터전을 옮겼다. 보증금 1억 원에 월 30만 원 정도의 집이었다. 마음에 들던 집에서 1년 만에 이사하려니 조금 슬펐지만 어찌하겠는가. 이곳에서 새로운 시간이 펼쳐지기를 기대했다.


“너무 멀지 않아? 출퇴근이 어렵겠는걸”
‘가까운데…’


여담인데, 우리 직장 동료들은 하남시를 굉장히 멀게 여겼다. 서울시 강동구에서 자란 우리가 듣기에는 의아한 소리였지만, 동료들 대부분이 서울 서쪽이나 서남쪽에 살고 있으니 어쩌면 걱정은 당연했다. 서울 동쪽에 와본 경험이 없어 거리 감각이 우리와 다를 테니 말이다. 우리는 지하철도 들어오지 않는 동네에서 출퇴근을 시작했다. (하남을 떠난 지금은 지하철이 뚫렸다.)


일산에서 살았던 오피스텔. 가운데가 두 번째 오피스텔 거실이다.
하남에서 살던 집. 집으로 치면 이곳만한 곳이 없었다.


하남에서 2년을 잘 지내다가 다시 이사를 결심했다. 경기도 여주시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부부가 프리랜서로 전업하며 여러 상황이 변한 까닭이다. 때맞춰 발병한 나의 뇌경색도 부모님 설득에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거칠 상황이 없었다. 시골 느낌 나는 지역으로 알아본 끝에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50만 원인 집을 계약했다. 가족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추후에 더 먼 지역으로 이사할 상황을 고려하면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강원도로 이사할 생각이었다.) 그만큼 새로 이사할 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2020년 12월에 이사했다. 시골의 겨울은 눈도 많이 오고 무척 추웠다. 도시에서 태어나 뼛속까지 도시인이었던 우리에게는 부족한 게 너무 많았다. 그래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니 마음도 함께 녹아내렸다. 아내는 봄에 핀 꽃들을 보고 살면서 처음으로 계절의 변화를 가까이 느꼈다고 했다. 나는 아침마다 개와 함께 1.5km 정도 되는 동네 초입까지 산책했다. 우리 마음과 삶이 변하고 있었다. 이 시골 동네로 이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주에서 구한 집. 추운 겨올에는 고양이도 이불에 들어가려 한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이사를 참 많이 다녔구나’ 다시 실감한다. 이곳 여주에서 10개월을 지냈다. 차도 연비 좋은 녀석으로 바꾸었다. 여주에서의 생활이 무척 마음에 든다.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 동네로 이사해서 좋다. 충북 단양에서 놀러 온 친구가 “우리 집보다 더 시골에 있네”라고 할 정도다.


그래도 나와 아내는 이 장소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더 잘 맞는 곳을 찾아 떠나려고 한다. 여러 지역을 떠도는 여행 같은 인생이 만족스럽고, 즐겁다. 지금 우리가 프리랜서로서 자유롭게 일하는 형태와 이사 다니는 삶이 잘 맞기도 하다.


본 글은 아내 소영과 남편 유영이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관점에서 바라본 집에 대한 이야기다. 다양한 집을 경험하며 ‘집이란 무엇인지’ 알아가는 여정을 기록했다. 둘이 함께 살았지만, 전·월세의 기억과 그 가운데 찍힌 방점이 분명 달랐다. 잦은 이사로 갈등도 겪었지만, 서로를 새롭게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우리 부부의 경험담이 누군가에게는 경쾌한 위로가 되길 바란다. 부디.


p.s. 이 글을 쓰고 나서 우리는 이사를 한 번 더 했다. 아내가 시골에 살며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알게 되어서다. 아내는 자신이 ‘도시인’임을 확실히 절감했다. 우리 부부는 서울에서 보증금 5,000만 원에 월세 100만 원인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지금 생각하면, 여주에서 보낸 10개월이 바람처럼 지나간 것 같다. 두 번째로 짧게 지낸 동네가 되었지만, 시골에서의 평화로운 삶을 통해 몸과 마음을 회복했다. 즐거운 추억들을 많이 남긴 동네로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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