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은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학원까지 들른 뒤, 날이 완전히 저문 시각에야 집에 들어섰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집 안은 숨을 죽인 듯 고요했고, 거실 한가운데 스탠드 하나만이 노란 불빛을 켜 둔 채 어둠을 붙잡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 소파에 앉은 아버지의 실루엣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고, 현은 평소라면 이미 불 꺼졌을 시간에 그 자리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거실을 채우고 있었다. 종이가 마찰을 일으키는 건조한 소리는 집 안의 공기를 한 장씩 접어 넣는 것처럼 규칙적이었고, 그 소리 사이로 다른 기척은 없었다. 현은 신발을 벗은 채 잠깐 서 있다가, 지나치게 조용한 공기가 오히려 부담스러워 낮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책에서 눈길도 떼지 않고 물었다.
“원서는 어디에 넣을 생각이냐.”
현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그 말은 언제 들어도 목 안쪽을 굳게 만들었다.
“영화 연출이요.”
대답은 짧았고, 더 보탤 말도 없었다. 그제야 아버지는 천천히 책을 덮었다. 책갈피를 끼우는 손끝은 유난히 신중했고, 마치 한 장면을 정리하듯 혹은 더 읽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듯 조용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거실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은 꾸짖음도, 반대도 아니었지만 현의 가슴에는 그 어떤 말보다 무겁게 얹혔다. 중학교 졸업식 날, 단정히 교복을 입고 부모 앞에 섰던 현이 처음으로 “영화 연출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때부터,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후까지, 아버지는 같은 질문만을 반복해 왔다. 질문은 언제나 같았고, 대답도 늘 같았지만, 그 말은 매번 공중에 잠시 머물다 아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응원하지도 않았다. 조언을 할 법한 날에도, 걱정을 가장한 말을 꺼낼 법한 순간에도, 그는 감정을 덜어낸 목소리로 묻기만 했다. 마치 정해진 문장을 암송하듯.
현에게 그 태도는 점점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어 갔다. 노골적인 반대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는 침묵이었다. 침묵은 하나의 입장이었고, 하나의 판단이자 태도였다. 아버지는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현이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을 날이 올 것이라고 믿으며, 묵묵히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사람처럼.
그날 밤, 현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말들이 더는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아버지는 제가 어떤 삶을 살길 바라시길래 매번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목소리는 생각보다 또렷했고, 그 또렷함에 현 자신도 잠시 놀랐다.
“제 행복이 곧 당신의 행복이라고 늘 말씀하시면서, 왜 제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 앞에서는 이렇게까지 아무 말도 안 하시는 거예요.”
숨을 한 번 고르고, 현은 거의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칫 무너지지 않으려는 듯, 단어 하나하나를 붙잡으며.
“제가 이 일을 하면 행복할 것 같아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적어도 남의 인생 흉내 내듯 살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요. 좀… 좋은 마음으로 지지해 주실 순 없는 거예요?”
하지만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현의 말이 끝난 뒤에도 거실의 공기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스탠드의 불빛만이 여전히 같은 각도로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이윽고 아버지는 신문을 천천히 덮으며, 낮고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엄마 깬다. 큰소리 내지 말고, 자거라.”
그게 전부였다. 현의 말은 벽을 두드렸다가 되돌아온 메아리처럼, 아버지에게는 닿지 않은 듯 보였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움직이지 않는 단단한 벽 같은 무관심이 자리 잡고 있었고, 현은 그 앞에서 더 이상 할 말도, 물러설 곳도 찾지 못한 채 잠시 서 있었다. 그 침묵 속에서 현은 깨달았다. 아버지는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들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주말인 다음 날이었다.
용빈과 영화를 보고 집에 들어선 현의 책상 위에는 스크랩된 신문 기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그 자리에 두고 간 것처럼, 책상 한가운데서 반듯했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마감한 영화감독의 기사였다. 종이는 여러 번 접혔다 펴진 흔적으로 가장자리가 희끗했고, 손때가 묻은 탓에 잉크는 군데군데 번져 있었다. 현은 그것이 오늘 아침의 신문이 아니라, 꽤 오래전부터 아버지의 손을 거쳐온 기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사진 속 감독은 입에 담배를 문 채 시공간을 초월한 얼굴로, 신문지 너머 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연출된 미소도, 변명도 없는 얼굴이었다. 반항과 체념이 엉겨 붙은 눈빛은 마치 ‘예술가의 최후’라는 무거운 제목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듯했다.
현은 한동안 그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눈을 마주친다는 감각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들여다보이고 있다는 기분에 가까웠다.
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생활고를 감수하면서까지 예술에 모든 걸 걸 수 있을까.’
그 질문은 막연했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사진 속 감독이, 마치 자신을 통해 젊은 날의 본인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길을 택하지 말라고, 그 선택은 결국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소리 없이 경고하는 얼굴처럼 보였다. 현은 그 얼굴에서 패배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를 읽었다. 실패가 아니라, 끝내 지켜내지 못한 시간의 무게 같은 것.
‘영화를 본다는 것과 만든다는 것, 그 두 감정에 정말 등식이 성립할 수 있을까.’
현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감동을 느끼는 일과 감동을 창조하는 일 사이엔, 건너뛰기엔 너무 깊은 골이 있다.
나는 스크린을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그 뒤에 따라붙는 고통까지 감내할 준비가 된 걸까.
혹시 나는, 감상을 창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질문들은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차곡차곡 쌓여, 현의 가슴 안쪽을 눌러왔다. 사진에 붙들린 시선이 도통 빠져나오질 못하자, 현은 결국 기사를 그대로 뒤집어 책상에 엎어버렸다. 종이가 책상 면에 닿으며 내는 마른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방 안에 울렸다. 하지만 기사는 뒤집혀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분명하게, 그 존재감을 남긴 채 거기 있었다.
“현아, 밥 다 됐다. 와서 앉아.”
엄마의 부름에 현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부엌에 들어서자 된장국은 아직 끓지도 않았고, 냄비 옆 도마 위에서는 이제 막 애호박이 썰려 들어가던 참이었다. 저녁은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엄마의 말은 습관처럼 앞서 나간 말이었고, 집 안의 시간은 늘 그렇게 어긋나 있었다.
현은 부엌을 지나 거실로 시선을 옮겼다. 소파에 앉은 아버지를 힐긋 바라보았지만, 아버지는 마치 그 자리에 아들이 존재한 적조차 없다는 듯,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현의 발소리도, 숨소리도, 아무런 신호로 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은 그는, 어제의 냉랭한 침묵을 무력하게 덮으려는 듯 리모컨을 눌러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에서는 의미 없는 예능 프로그램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웃음은 이 집의 공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에는 이미 여러 번 넘겨진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신문이 들려 있었다. 종이의 모서리는 닳아 있었고, 특정 면에는 반복적으로 접힌 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현은 그 신문이, 방금 자신이 책상 위에서 마주한 기사와 같은 신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소파 옆 탁자 위에는 오늘 자 신문들이 각기 다른 신문사의 이름을 달고 차곡차곡 쌓여 있었지만, 그 질서는 어딘가 조급하고 위태로웠다. 제목이 보이도록 일부러 펼쳐진 면들, 가위질 자국이 남은 기사들, 그리고 제자리를 잃고 바닥에 흩어진 몇 장의 종이들. 그것들은 단순한 신문 더미가 아니라, 말 대신 쌓아 올린 아버지의 논거처럼 보였다. 직접 말하지 않아도, 보여주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듯한 태도.
현은 그 앞에서 문득 깨달았다. 아버지는 묻지 않고도, 이미 대답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이 집에서 신문은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침묵을 보강하기 위한 도구였고, 기사 속 타인의 비극은 언제든 현의 미래로 호출될 수 있는 예시였다. 그 사실이 현의 목을 조용히 조여 왔다.
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방금 전 뒤집어 놓은 기사 속 얼굴과, 지금 거실에 펼쳐진 신문 더미가 하나로 겹쳐지며, 현의 마음속 어딘가에 지워지지 않는 예감을 남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