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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Mar 19. 2016

이석원 수연산방 스벅 재즈 그리고 겨울

Shanghai #49

이석원의 산문집을 꺼내 든다. 

한동안 책을 읽지 못했다. 책 읽을 여유가 없었다기 보다, 여유로움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지난날 내가 그토록 진절머리 났던 것은, 복잡하고 힘들고 지친 일상이 아니라, 고단한 일상의 영원할 것만 같은 루틴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이라면 수십 권 읽어도 되는 단순하고 여유로운 일상이 다시 '새로운 루틴'이 되자 몸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좀이 쑤셨다. 손가락 마디를 두두둑 꺾고 한바탕 거친 몸싸움을 하면 시원할 듯싶었다. 뭔가 복잡하고 심각하고 진지한 일, 가령 열 시간 동안 뇌를 쏟아내는회의를 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으로 요즘 '쉽게 성사될 것 같지 않은' 심각한 일들을 구상하고 있다. 다행히 크리에이티브란 것이, 한 업종을 규정짓는 것이 아님을 배운지난날 덕분에, 새로운 일들을 아이데이션하는 것도 그리 낯설지는 않다. 


머릿속에 새로운 생각들이 꿈틀대니 일상의여유도 더 편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렵고 복잡하고심각한 일들을 해보겠다고 결심하고서야, 다시 책이 읽혔다.


동네 스타벅스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뒷자리에선 중국인 아줌마들을 앉혀놓고한국 아저씨 하나가 K-beauty 비즈니스 투자 설명을하고 있다. 내가 듣기엔 다 사기꾼 같은 소리인데, 부자아줌마들이 내심 진지하다. 뭐 대박 나면 다행이고. 옆자리엔 일본인 직장이 두 명이 일본인 답지 않은 큰소리 대화를 나누고. 앞자리에선 유럽인 커플 두명이 상하이 어떤 클럽의 쌔끈함에 대해 늘어놓는다.


머리 위에선 영화 위플래시의 플래쳐 교수가 경멸했던 '스타벅스 재즈'가 흐른다. 나는 오히려 재즈를 듣고 싶어 스타벅스에 오기도 하는데, 지금 흐르는 마일즈 데이비스/존 콜트레인의 'Someday my prince will come'같은 곡을 들려주는 스벅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석원의 산문집에서 '수연산방'이 등장한다. 

오래 전 어느 겨울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가봐야 하지 않니'하며 회사 동료가 나를그곳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맑고 차가운 공기가 마당을 휘감고, 뜨끈한 방 창가의 유리창에는 김이 서렸다. 따뜻한 국화차를마시며, 이게 겨울의 맛이구나. 생각했다.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인데, 그때의풍경이 '겨울의 낭만'으로 각인되었다. 동료는 내 사진을 찍어주며, 고개를 들지 말 것. 찻잔의 물을 바라볼 것. 같은 충고해주었다. 그날의 사진을 나는 좋아한다. 그래서'수연산방'도 좋아한다. 이름 때문이겠지만, 마치 내가 성북동에 차린 찻집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 이 순간, 이석원 아저씨가 내 맞은편에 앉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으면 좋겠다.

그냥 어쩌다 마주앉은 사람들처럼 나랑은아무 대화도 하지 않고, 가끔씩 의미 없이 눈빛을 마주치기도 하면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도 괜찮다. 그러다 마일즈데이비스의 트럼펫 연주부분이 나올 때, 동시에 하던 일을 멈추고 멍한 눈으로 그 소리에 집중하기도 하면서. 그 아저씨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앉아 스벅 아메리카노와 스벅재즈만 공유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변태 같은 생각을한다.


스타벅스 창 밖으론 11월의 비가 흩날리고 있다. 

내내 인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스벅 유리창에 비친- 두터운 머플러를 풀지도 않고 아메리카노를 후후불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서는, 가을이 떠나버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상하이에서 두 번째 겨울을 맞는다.


현재 서울은 3도, 상하이는 10도.

하지만 개개인의 겨울에는 온도가 없다. 각자의 겨울이 있을 뿐이다. 겨울은 상대적이지 않고, 추위는 절대적이다. 그러니 각자의 겨울은 공평하다. 내가 겪어낼 겨울도 아직 짐작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겐 아직 다 읽지 못한 이석원의 산문집이 남아있고, 엊그제 손님이 배달해준 김연수와 김훈의 책이 있고, 손님이 챙겨준 홍삼 액기스도 있고, 상하이에서는 한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새콤달콤' 캬라멜과 과자도 생겼다. 고마워.손님도, 손님이 곧 될 사람도.


남편을 재우고 거실에 앉아 오래도록 즐기는새벽 시간이 좋다.

내일 수업이 없으니 더 좋다.

그리고 원래 새벽은 겨울이 깊어질수록더 맛이다.


201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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