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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Mar 19. 2016

당신의 일상은 안녕하나요

Shanghai #51

정확히는 12월 31일 밤

그러니까 전 세계가 새 희망을 터트리던 새해 첫날,

내 몸엔 지독한 감기 바이러스가 폭발했다.


한 해의 액땜을 한방에 치르려는 듯 감기의 모든 증상이 패키지로 발현되었다.

기침을 하면 목에서 피맛이 났고, 낮엔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콧물이 흘렀고,

밤마다 응팔 러브라인처럼 답답하게 코가 막혔다. 무엇보다도 내 온몸의 피부가 각성한듯 

털실 한오라기에도 통증을 느끼는 몸살이 매일같이 찾아왔다.


거실 소파에 하루종일 누워있으니 허리가 아팠고, 침대로 돌아가 누우면 머리가 아팠다.

이불을 덮으면 갑자기 땀이 쏟아져 이불이 다 젖었고, 열이 오르는 중에도 미친듯이 추웠다.


입맛도 없었지만 식탁에 앉아 있지도 못했고, 열려있는 콧구멍으로 숨쉬는 것도 힘들었다.

그때 마침 남편은 출장이 잡혔다. 환자의 고통이야 어차피 나눌 수 없는 것이므로

일하는 자는 일을 하러 떠났다.


그 후 3일을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모든게 힘들었고, 귀찮았고, 그렇게 모든게 정지했다.

남편이 돌아오는 날은, 그의 생일이었다.


겨우 남아있는 의욕과 식재료를 끌어모아 간신히 만둣국 한 냄비를 끓였다.

미역국을 하고 싶었는데, 건미역의 유통기한이 1년이나 지났다는 걸

몽롱한 의식으로 확인하고선 쓰레기통에 버렸다.


며칠만에 집에 온 생일자에게 미역국도 아닌 만둣국을 데워주려고 인덕션에 냄비를 올렸다.

다 데워졌나, 하고 뚜껑을 들어올리던 그때, 내 손이 아닌듯 냄비 뚜껑을 놓쳐버렸다.

냄비 뚜껑은 자유낙하 하여 냄비를 강타했고, 순간 프랑스산 유리 냄비는 인덕션 위에서 비명을 지르며 쪼개졌다.


만둣국 국물이 시뻘건 인덕션 전기선 위에서 지글지글 끓었고 만두들이 냄비에서 탈출했다.

그리곤 몽롱하나마 조금 남아있던 내 정신도 동시에 탈출했다.


아무것도 만지지마.

유리 조각이 튀었거야.

다 버려야돼.

남편은 달려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새 만둣국인데

아직 한숟갈도 안먹었는데

이거 며칠만에 겨우 만든건데

이제 먹을거 아무것도 없는데

글고 오늘 자기 생일인데

...


나는 갑자기 장난감을 놓쳐서 부숴버린 아홉살 조카처럼 펑펑 울었다.


이게 울 일인가? 라는 생각조차 할 틈없이 서럽게 울어서 

남편은 하마터면 유리조각 만둣국을 먹어줄 뻔 했다.


그리고 다음날, 엎친데덮친격으로 찾아온 위경련.

맨정신 통증으로 10시간 이상을 뒹구는 불면의 밤이 찾아왔고 

그 새벽, 유통기한이 세달이나 지난 소화제를 지푸라기 잡듯 삼켰다.


그 전날 허망하게 만둣국을 날려먹은 때문인지, 그때 어이없는 울음을 터트린 때문인지.

위경련으로 잠을 못잔 때문인지, 다음날부터 이상한 증상이 시작되었다.


지독한 몸살은 끝이 났지만 경미하게 지속되는 두통과 콧물 기침이 장기투숙 고객처럼 들어앉았고,

평생을 괴롭혀온 불면증이 재발하면서 모든 것이 귀찮다. 의미없다. 의욕없다.로 귀결되었다.


중국어도 알바도 아니, 집을 나가기도 앉아있기도 책을펴기도 밥을먹기도 말을하기도

힘든건지 싫은건지 알수없는 날들. 그렇게 새해의 열흘이 지났다.

그리고 어제 모처럼 길게 바깥바람을 쐰 계기로 내 정지되었던 일상도 다시 조금씩 시작되었다.


견고하지 않은 일상에도 나름의 루틴이 있는 것이고, 그것은 사소한 계기로도 균열될 수 있으며,

인간의 의지란 이토록 일상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라는걸 실감한 요즘.


나는 여전히 종이 한장 차이로 모든 것에 의욕을 잃을 수 있는 경계에 있고,

오늘까지도 기침과 불면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래도 다행인 사실 한 가지는

지금 내가 거실 소파가 아닌, 밖에 나와 앉아있다는 것이다.


자주오던 시내 카페에는 여전히 수많은 인종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느 순간 자신의 일상이 멈추어 버린다 해도, 집 밖을 나서는 만으로도 

또 어느 순간 무심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으로 

물 흐르듯 다시 합류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한가 보다.


라지 사이즈 아메리카노의 카페인이 온 몸의 혈액을 타고 돌자

어느 부분은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한 것 같기도 하고,

눈이 조금 밝아진것 같은 느낌도 든다


끊어놓고 삼개월째 단 한번도 가지않은 헬스장 연간 회원권을

이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6.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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