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 모범환자의 2020년 엔딩은

코로나 난민의 제주표류기 ⑪

by 연필소녀

제주에 코로나가 창궐이다. 서울만큼은 아니어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작은 도시에서 눈 뜨면 0시 기준 확진자가 수십 명이 나왔다는 알림을 받는다. 서울보다 땅이 세배 큰 곳이라서, 인구밀도가 낮아서, 그래 봐야 60만의 도시라서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이곳에는 의료진도, 코로나 집중치료시설도, 음압병상 수도, 모든 것의 절대 숫자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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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공황장애 상담 진료를 받는 날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사우나발 집단감염 이야기가 나왔다. 최근 3일 동안 확진자가 나온 사우나가 대여섯 개다. 매일같이 '사우나를 방문한 이들'의 검사 독려 문자가 온다. 그런데, 왜 이 시국에 사우나를 가는 걸까. 꿀단지라도 묻어놓았나. 왜 지금? 아니, 집에도 따순물 나오잖아요!


그게, 이 시국에 갑자기 가는 게 아니에요. 선생님이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그럼요?

그분들은 새벽이든 밤이든, 반드시 가서, 거기서 씻고, 거기서 몸을 풀고, 매일 그걸 해야 한대요.

왜요?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셔서 하루라도 안 가면 몸이 안 풀리고 병이 난다고.

아니, 감염이라도 되면 어떡하려고요!

마스크에 비닐봉지를 씌워서라도 가신대요.

헐.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저희 어머님이세요. 어머님 친구분들이시고요. 자식 말도 의사 말도 안 들으세요. 무조건 가야 하신대요. 오늘도 가셨고요.

아..;;;;


할 말을 잃었다. 마지막이 압권이었다. "거 그냥 다 운이여"라는 말씀을 하시며 선생님의 어머님은 사우나로 출근하셨다고 했다. 우리 둘 다 한숨을 쉬었다. 제주도 할머니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독립적이고 고집 센 분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분들의 캐릭터를 짐작할 수 있어서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한국 상황이 안 좋으면 상하이로 돌아가는 게 더 어려워지지 않아요? 선생님이 물었다.

아무래도 그렇죠. 한국은 다시 위험국가가 되었으니까요.

걱정이 되진 않고요?

네. 괜찮아요. 어차피 겨울엔 쉽게 코로나가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아서, 봄에 가자. 마음먹었거든요. 편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역시. 00 씨, 이제 공황장애는 정말 완치가 된 것 같아요.


만 9개월째다. 치료를 시작한 지. '좋은 사인이다. 잘하고 있다. 잘 되고 있다.' 그런 말은 들었어도 '완치'라는 말을 정식으로 들은 건 처음이다. 순식간에 지나간 단어였지만, 뇌리를 스쳐 가슴에 쑥 박혔다.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살짝 벅차기도 했다.


3월에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이후, 바로 요가를 시작했다. 호흡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언니 집에 묵혀두었던 러닝머신을 잠 깨웠고, 빨라지는 호흡에 대처하는 연습을 했다. 여전히 운동은 매일 한다. 하루 서너 잔 마시던 커피를 끊었고, 교감신경을 흥분시키는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상담을 빠진 적도, 약을 거른 적도 없다. 인터넷에 떠도는 '공황장애 약'에 관한 '썰'들에 흔들리지 않고 선생님의 진단과 처방만을 믿었다. 선생님이 권하고 당부하는 모든 것을 실천했다. 모범 학생, 모범 직장인, 모범 자식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모범 환자' 하나는 해냈다. 그리고 9개월 만에, 완치라는 단어를 수료장처럼 받았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다. 제주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1도 없고, 산타할아버지는 열 살 즈음 존재를 들키며 떠나버렸지만, 올해 크리스마스엔 선물을 받은 것 같다.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알고 있다는 산타 할아버지가 돌아와 착한 환자인 내게 주고 간 '완치'라는 선물. 2020년 한 해는 패닉, 피난, 유목 등의 단어로 점철되었지만 엔딩은 나름 기특하다. 어쨌거나 나는 살아남았잖아.


내 제주 생활은 일 년째 내 집도 없이, 언니 집에 얹혀사는 표류 같았지만 어느새 항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족들이, 선생님이, 너덜너덜한 판자에 돛을 달아주고 나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내 인생이 어디에 도달했는지, 그 끝은 아닌지, 너울대는 밤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평온한 아침바다를 보여준 것도 그들이다. 이제야 바다 먼 곳, 내가 몸을 일으키고 노를 저어 가야 할 곳이 보인다. 내가 모범 환자여서가 아니라 모범 가족, 모범 선생님을 만난 덕분이라는 것을 안다. 이제 막 항해를 시작한 내 초라한 판자 위 깃발에 그들의 이름을 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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