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난민의 제주표류기 ⑧
어김없이 찾아오는 '병원 가는 금요일'. 벌써 8개월째다. 여태 단 한 번도 병원에 늦거나 안 간 적이 없다. 나 같은 모범환자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덕분에 지난주 저녁 약을 한알 더 줄였고, 약이 줄었어도 그 전주와 아무 차이 없는 한 주를 보냈다. 선생님은 오늘 아침 약을 반 더 줄였다. 이제 슬슬 우리 안 볼 때가 되어가네요. 선생님의 이별 예약이 서운할 정도다. 하지만 약이 그라데이션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계속 모범환자로 간다.
어제 내 인생의 러닝메이트가 '나 가을 타나 봐. 좀 다운되네'라고 말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나는 점점 더 좋아지고 안정되어 가는데 타국의 혼자 있는 남편은 홀로 우울하다니. 선생님께 복잡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안타까워하시면서도 선생님은 '당연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말, 내가 상담 첫날 들었던 말이다.
"당연하죠 00씨, 그런 상황을 겪었는데 어떻게 멀쩡 했겠어요." 그 당연하다는 말이 내게는 누군가 내게 해 준 첫 위로였고, 그 시기에 가장 위로가 되는 한 마디였다.
"왜, 너만 겪은 코로나도 아닌데, 너만 느낀 패닉도 아닌데, 너만 걸린 감기도 아닌데, 너만 있는 천식도 아닌데, 너만 외국에 사는 것도 아닌데, 너만 힘들게 한국으로 온 것도 아닌데. 왜?" 다들 에둘러 표현했지만 결국은 그런 말로, 그런 표정으로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나도 답을 알 수 없는 말. 나도 알고 싶고, 내가 더 억울한 질문.
담당 선생님으로서 당연히, 당연하죠 00씨.를 매뉴얼대로 해 주었다 해도, 나는 그 말이 눈물 나게 반가웠다. 듣고 나서야 내게 그런 말이 필요했다는 걸 알았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든든하게 선생님을 믿고, 모범환자가 되었다.
하지만 내 병과 치료에 집중하느라 남편의 상황을 생각치 못했다. 코로나 2차 대 유행에, 타국에 살며, 백신은 남 얘기, 확진자가 많이 없다해도 경기가 살아난 것은 아니고, 사업 일정은 모두 홀딩되었며, 언제 재개될지 알 수 없고, 최선을 다해 살고 있지만 결과는 무엇하나 없는 날들, 주위를 둘러봐도 좋은 소식 하나 없고, 와이프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며, 홀로 8개월째 잠드는 밤, 마침 그는 감기에 걸렸다. 와중에 '밝고 착하고 누구보다도 긍정적이었던' 연예인의 자살 소식. 그 소식은 내게도 큰 충격이었지만 남편은 더 크게 영향을 받은 듯했다.
"당연하죠, 남편이 아무리 자기 관리 잘하는 독립적인 사람이라 해도 그런 상황에 누가 우울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도 아내에게 그런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잘하는 일이에요. 서로 이야기하고, 더 연락하고, 더 챙겨주면 차차 나아질 거예요. 그리고 남자는 원래 가을을 타잖아요."
에이. 그건 심적인 거잖아요. 라고 말하기 무색하게, "정말이에요. 가을에 남자는 호르몬 때문에 우울해지기 쉬워요. 여자는 봄을 타죠. 그것도 호르몬 때문이에요"
오. 그게 그냥 날씨와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생리적인 것이라니! 병원에서 나오면서 남편에게 연락을 했다. 네가 우울한 건 당연한 거래...!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어? 가을 타는 건 호르몬 때문이구나...! 그래, 당연히 우울할 수 있는 상황이지. 충분히 그럴만해. 게다가 호르몬이 날뛰고 있다는데!"
그도 나처럼 놀라고, 위안을 받은 것 같았다. 톡 창에 새겨진 느낌표로 알 수 있었다. 호르몬 때문이기도 하구나.
때로는 어떤 말 한마디가 꽉 막힌 가슴에 숨구멍을 뚫어주는 법이다. 그는 매일 더 나아지고 있다고 했다. 전날 밤엔 친구들 셋이 모여 아무 생각 없이 웃긴 얘기들을 나눴다고도 했다. 그래, 더 자주 쓸데없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면서 살아야 해. 요즘 세상에 '쓸데없고 시시껄렁한 웃음'만큼 쓸데 있는 게 또 없거든. 내가 거들었다.
네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 네가 안정돼야 나도 안정된다. 네가 웃어야 나도 웃을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없는 날들에도, 시시껄렁하고 하찮게라도 자주 웃어줘.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에게 늘 하던 말이 있다. 작고 하찮은 것에도 쉽게 웃는 나에게, 뭐 그런 시시껄렁한 것에 웃냐. 고 그가 어이없다는 듯 내게 말하면, 내가 다시 어이없다는 듯 그에게 했던 말. "내가 웃고 내가행복해야 너도 행복한 거야. 이 사람아"라고.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웃게 할 의무가 있다. 이제 내가 더 의무를 다해야지. 우울한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하다'니까. 우리는 러닝 메이트니까. 내가 그를 뒤에서 밀어줄 때다. 그가 지금보다 조금 더 웃을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