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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올챙이 시절 너무 생각나

보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달랐다

by 김수달


미래 조건부 인생

김수달의 수험생활은 길었다. 20대를 오롯이 청춘의 무덤, 고시촌에서 보냈다. 찬바람 불면 '혹독한 1년 또 시작되는구나' 수달 마음 바람 앞 촛불처럼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나도 수험생이 아니라 감독관으로 시험장에 와보고 싶다'는 짠내 나는 희망사항만큼이나 김수달의 미래는 합격을 조건부로만 그려졌던 때다. 합격하면 여행도 가야지, 합격하면 미드 실컷 봐야지, 합격하면 게임해야지, 합격하면 효도해야지, 인생의 모든 계획이 시험과 함께 미뤄지던 시절이다. 두 손을 다 써야 셀 수 있을 만큼...


글씨를 너무 잘 써도 문제

바램 만큼이나 든든한 실력을 갖췄다면 김수달 생존기는 없었을 수도 있다. 다행히도(?) 김수달은 수험기간에 비례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고, 숱한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리고 훗날 웹툰 소재로 쓰이게 된다.(눙물) 그 한 예가 '어 잘 썼다'라고 자평하며 제출한 모의고사 답안지를 교수님이 과락을 주신 일이다. 거기까지만 하셨으면 좋았을텐데 "수달씨는 글씨를 너무 잘써, 그래서 틀린 답안을 쓰면 그게 너무 잘보여서 감점을 더 받을 수 있을 정도야"라고 하셨다. 뚫고 들어갈 바닥도 없다고 생각한 김수달, 후배들 보는 앞에서 밑바닥이 더 있음을 확인했던 날이다. 37점이라니, 거 너무하신거 아니셨소 교수님...(충격요법이 효과가 있었던지 실제 시험에서 꽤나 높은 점수를 받음 ^오^;)


후광

몇 번째 시험인지도 모를 어느 해 시험장에서 본 그 감독관은 흐뭇한 미소는 잊을 수 없다. 감독관은 미소 한가득 머금으며 시험지를 응시했다. 성취감 가득한 그 표정과 달리 김수달은 떨고 있었다. 분명 같은 시험지인데... 운동복 차림의 장수생 김수달의 가슴팍에 서글픔 한 스푼 더 얹혔다.


감독관 차출

그 서글픔 비할 수 없을 최악을 몇 번 더 겪고서 수달은 합격했다. 기쁨보단 안도감이 먼저였던 김수달. 직장생활 중 첫 감독관 차출에 꽤나 신기하고 즐거웠던지 전날 잠을 설쳤다. 흐뭇하게 웃으며 시험지를 보진 못할지라도(수달이 봤던 시험이랑 달라서 봐봤자 못 품) 성취감 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막상 시험장에 도착하니 특유의 긴장감이 김수달을 압도했다. 조용한 교실에서 느껴지는 그 특유의 무거운 공기와 긴장감은 감독관이 돼 맞닥뜨려도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수험생활 독이 아직 덜 빠진 걸까. 긴장하면 화장실을 자주 가는 버릇이 그대로 나와 버릴 정도였다.


할게 못된다

김수달은 매우 예민했기 때문에 옆자리 수험생이 다리를 떨거나 감독관이 제 주변을 조심성 없이 배회할때면 온통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시험을 망치기 일쑤였다. 수험생에서 감독관이 되어 돌아왔다는 성취감은 차치하고, 숨죽이며 문제를 풀고 있는 수험생을 보니 발한짝 차마 떼지 못할 정도 였다. 수험생 시절 긴장감을 그대로 안고 감독관 업무를 수행했던 그날 이후 김수달은 시험감독관을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전국의 김수달들 힘내라

지금도 1년에 한 번은 시험감독관으로 차출되고 있다. 최근에는 감독관 준수사항이 더 엄격해졌다. 김수달 같은 예민한 수험생들의 서글픈 바람이 가이드라인이 된 게 아닐까 싶다. 시험감독관이 시험지를 훑어봐도 안되고, 발자국 소리를 크게 내거나 한 곳을 너무 오랫동안 응시해도 안되고, 같은 패턴으로 계속 왔다 갔다 해도 안된다. 사전교육 때 이와 같은 내용을 전달받는다. 어디 수험생들이 옛날보다 예민해졌겠는가. 세상이 점점 더 각박해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전국의 모든 김수달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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