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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 백조의 발길질

우아한 백조도 물속에선 쉼 없이 헤엄치고 있죠

by 김수달


직업병

일종의 직업병이랄까. 김수달은 콘서트, 작품전, 전시회, 회의... 하다못해 가족 친지 모임에 참석할 때도 모임을 준비한 사람을 생각한다. 평범하고 별거 없어 보이는 행사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누군가의 노고가 곳! 곳! 에 서려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에...(눈물 한 방울 닦고 시작하자)


무난한 행사와 무난하지 않은 준비

무난히 치러진 행사 준비는 절대 무난하지 않다. 큰 행사 같은 경우 돌발사고 없으면 성공이라 할 정도니까. 스무 명이 참석하는 회의를 예로 들어보겠다. 보통 회의장 책걸상은 ㄷ자형으로 둘러지고, 단상 쪽엔 어떤 회의인지 알만한 현수막이 걸린다. 참석자가 참석 명부를 작성하고 착석하면 사회자가 안내를 시작한다. 회의 취지 설명과 함께 참석자를 소개한 다음 회의 주재자에게 진행을 넘긴다. 주재자는 1시간 정도 회의를 진행하는데 일반적으로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의견을 말한다. 회의에서 뭔가를 결정해야 될 사항(의결 사안)이 있으면, 해당 사안과 관련된 부서장이 해당 사안에 대해 보고 형태로 발표를 하고 의견을 듣거나 한다. 끝으로 기념사진 촬영 후 회의는 마무리된다.


이 회의 담당자는 적어도 보름 전부터 회의장을 예약하고, 현수막 크기, 디자인, 문구를 구상할 것이다. 좌석을 배치하면서 어떤 사람을 어느 자리에 앉힐 것인지 고민하고, 테이블에 놓일 회의자료 작성해서 인쇄를 맡길 거며, 참석자 출입 명부 만들고, 행사장 안내판(배너)을 준비할 것이다. 회의 주재자(높으신 분)께 회의 취지는 어떻고, 이런이런 말들을 해주십사 보고 드려야 된다. 보고 드려야 한다는 말은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단 소리다. 만일 당일 회의가 참석자들의 건의사항을 청취하는 자리라면 어떤 이슈가 있고, 어떤 취지의 답변을 해야 되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도 함께 보고해야 한다. 홍보를 할 참이면 보도자료를 작성해서 대변인실에 넘겨야 한다. 이경우 대변인실과 보도날짜 협의가 필요하다. 참석자들에겐 일일이 연락해 참석 요청도 드려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담당자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서 상관인 과장, 국장, 실장 경우에 따라서는 장차관에게 보고해야 되며, 직속상관에게는 수시로 상황보고를 해야 된다.


당일 현장에서는 각각의 물품들이 제 위치에 비치되어 있는지, 마이크와 같은 음향장비가 제대로 되는지 확인한 다음 리허설을 한다. 리허설 과정에서 애매한 부분이 있으면 상관에게 판단을 받아서 조치하는 과정을 거친다. 행사가 시작되면 그제야 "흘러갈 뿐"이라는 안도(+될 대로 돼라)와 함께 행사를 지켜보게 된다. 보통 담당자가 사회를 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사회자 시나리오도 본인이 준비해야 한다.


하여간 공무원들 쯧

"행사 내용, 콘텐츠가 중요한 거지... 으이그 역시 공무원들은 허례허식이 너무 많아"...

맞다. 허례허식이라 느껴질 만큼 행사 그 자체 준비가 철저하다. 담당자 조차 회의의 내용보다 형식을 더 신경 쓰는 상사의 행동에 '이건 아닌데'란 생각이 들 정도니 말이다.


그래도 그 발버둥, 이유 있다

그란데 말입니다. 대충 준비한 회의나 행사에서 양질의 논의가 오가는 경우를 본적이 없다. 친목모임이야 시시콜콜한 이야기 그 자체가 목적이지만 바쁜 시간을 쪼개 참석한 전문가, 교수, 연구원, 시민단체, 각 부처 공무원들이 이도 저도 아닌 붕 뜬 이야기로 1시간을 보낼 수는 없단 말이다. 회의 준비 과정을 내용과 형식으로 구분한다면 내용이 8-90을 차지할 거란 것. 회의장 준비, 자리배치, 현수막 준비 등 한숨부터 나오는 행사 준비는 기본 중의 기본일 뿐... 안건을 만들어내고, 후속 조치를 검토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그런 고로 행사의 형식적인 부분은 잘 갖춰놔야만 그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논의가 물 흐르듯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참석자들은 행사에 참석해서 의견을 제시하면 일정이 끝나겠지만 담당자는 발언들을 정리하고, 검토하고, 보고하고, 확인하고, 검토하고, 보고하고, 수정하고, 보고하는 과정을 거친다. 행사가 곧 새로운 업무의 '시작'인 경우가 많은 것. 외부의 비판적인 시선은 혀례허식 개선에 필요한 채찍질이 되지만 그 잔잔해 보이는 물결 아래는 담당자들의 발버둥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을 거란걸 아는 사람은 알것이다.


마치 타자의 이야기인 것처럼 서술한 김수달의 서글픔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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