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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Nov 01. 2019

당신은 비교를 당하시나요? 아님 비교를 하시나요?

비교가 가진 두 얼굴, 절망과 희망

택배가 왔다. 서울에 사는 조카가 어머니께 보낸 것이다. 상자에 적힌 주소만으로도 내용물을 추측할 수 있었다. 화장품이다. 조카는 취직 후 어머니께 계속 화장품을 보내고 있다. 남자인 조카가 여자 친구도 아닌 할머니의 화장품을 골라 택배로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조카는  일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인 양 화장품이 떨어질 때쯤이면 늘 이렇듯 화장품을 보낸다.


할머니에 대한 갸륵한 마음을 가진 조카, 시누의 아들이다.


조카 녀석은 김 씨 집안의 첫 손자였다. 비록 외손자이긴 했지만 첫 손자라는 혜택을 받고 태어난 조카는 집안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특히 막내 외숙이 되는 남편은 이 조카를 특별히 사랑하여(시누가 아주버님이 다른 지역으로 발령받았을 때  시댁에서 지낸 적이 있다고 한다) 조카가 어렸을 때 장난감이며 옷 등 많은 것들을 사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둘 사이는 각별하여 허물없이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는 친구처럼 편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각별함이 가끔 비극을 불러온다는 게 문제였다. 남편은 조카와 우리 아이들을 종종 비교했다.

'ㅇㅇ형아는 5살 때 어떠했다느니, ㅇㅇ오빠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를 얼마나 잘했다느니...'

남편은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때마다 이런 비교를 통해 아이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이들 역시 조카를 좋아한 탓에 아빠의 그런 말에는 특별히 토를 달지는 않았다. 조카는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에게 잘한다. 큰집에도 다른 조카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에겐 우리 아이들에게 보이는 만큼의 친근감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그런 조카 좋아한다.


그리고 남편의 비교를 비난하면서도 나 역시 가끔 마음속으론 조카와 우리 아이들을 비교하는 이율배반적 행위를 한다.

그러면서 또 시누를 부러워한다.

시누는 자식을 참 편하게 키웠다고.  

자식들이 알아서 잘 자라 주었으니 얼마나 좋겠냐고.

하지만 어찌 알겠는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시누 역시 그동안 자식을 키우며 했던 맘고생을 한 보따리 풀어내며 그런 말일랑 하덜덜덜 말라고 할지.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보따리를 풀 만큼의 일이 없기에 결국 시누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난 이 조카를 초등학생 때부터 봐 왔다. 초등학교 때 모범생, 중학교 때 모범생, 고등학교 때 모범생.

이 모범생이란 말속에는 공부를 잘한 것만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 아이의 생각, 인성, 사람을 대하는 태도까지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조카 녀석, 남의 자식이지만 참 잘 자랐다. 잘 자란 남의 자식과 내 자식을 비교하면서 난 우울해한다.

'세상에 이런 아들은 없을 거야'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내 아들에게까지 조금만 더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며 좌절한다.


비교, 잘난 사람은 이렇듯 의도치 않게 주변 사람들의 비교 대상이 된다. 그가 원치 않는다 해도 자신이 모르는 장소에서,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입에 안주거리가 되어 오르내린다.


그런데 조카의 대견한 행동 때문에 우울했던 기분이 예상치 않는 전화 한 통화로 위로를 받았다.

어찌 그런 전화로 위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지.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나 자신이 싫지만, 이성만으론 제어가 되지 않는 이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전화로 잠시 초라해졌던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화는 지금의 동네에서 같이 살았던 아는 동생에게서 온 것이다. 이곳에 살 때는 언니, 동생 하며 친하게 지냈는데 그 동생이 이사를 간 후 몇 년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동생이 자신의 딸과 동갑인 내 아들의 근황을 궁금해 하며 전화를 한 것이다.

그 동생, 참 야무지고 당당한 워킹맘이었다. 아니 훌륭한 예술가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지금도 활발히 작업 활동을 하고 있으니.

그 동생은 고 3인 아들에게 시험 잘 보라는 말을 전해주라면서 자신의 딸은 수시전형으로 이미 학교가 정해졌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데 난 그 동생의 딸이 갔다는 학교를 듣고 적잖이 놀랐다. 그 학교는 아이들 사이에서 공부를 하지 않고 놀기만 해도 가는 학교라는 놀림을 는 학교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동생의 딸은 그 학교를 갈 정도의 성적은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그 학교에만 있는 과에 가야 해서 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학교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난 내 아들은 적어도 그 학교보다는 좋은 학교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공부할 거라는 비겁한 생각에 잠시 기분이 편해졌다.


sky를 나와 좋은 직장에서 해마다 연봉 협상을 한다는 조카와 내 아이를 비교하며 우울했던 나는,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학교를 다니게 되었으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학교에 가게 되었다며 좋아한다는 동생의 딸로 인해 위로를 받았다. 마치 저런 학교를 다니면서도 행복해하는데 아들이 가겠다는 학교만 가도 대학 입학은 잘한 것이 아니냐는 비교를 하면서...


사람은 어디에서든 자신이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최고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남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삶을 망치고 있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비교는 나보다 나은 사람과도 나보다 못한 사람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비교로 나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느냐를 생각하면 비교로 무엇을 얻어야 할지 판단이 설 것이다.


나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를 할 때는 나를 발전시키기 위한 비교를 해야지 나를 좌절시키는 비교를 해서는 안 된다.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를 할 때는 우월감을 느끼위한 비교를 해서는 안 되고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는 희망을 품은 비교를 해야 한다.

비교는 종종 인생을 망치는 잘못된 행위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그 비교를 통해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비교는 절망이 될 수도 있고, 희망이 될 수도 있다.

잘난 사람을 보며 나를 발전시키고, 못난 사람을 보며 희망의 의지를 다지는 비교는 나를 성장시키는 도구가 될 것이다.


조카와 아는 동생의 딸을 통해 난 비교의 두 얼굴을 보았다. 비교를 통해 절망을 선택할 것인지, 아님 희망을 선택할 것인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마음에 달려있다.

모두들 비교 속에서 좌절하지 말고 그 안에서 희망을 찾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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