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맛. 21세기 육아법

이제야 답합니다.

by 일상라빛



애 하나 키우기도 힘든 요즘 무엇이 문제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지 못해서다. 불행한 이유거리야 많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니까.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너무 좋아서 내 인생이 절망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의 한낱 미소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힘들고 지친데 너는 웃음이 나오느냐? 홀로육아를 하는 부모라면 순식간에 타인의 행복이 반갑지만은 않은 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도대체 애 하나 키우기가 왜 이리도 힘든것일까? 7개월 전 공감댓글에 달린 질문이 외롭지않으면서도 쉽사리 이유를 답할 수 없었다. 막연히 일상적으로 육아가 힘들다고만 치부했었다. 타인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상담사가 정작 제 마음은 방치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건가? 그 질문은 6개월 간 내 마음을 이곳 저곳 자유롭게 헤엄치고 다녔다. 그리고 생각의 끝에 다다랐다.





청소년 상담시 사용되는 감정카드는 약 36~48가지로 축약된다. 적지 않은 감정 중에서 사실 희로애락을 주관하는 상위 카테고리는 '행복' 과 '불행'이다. 두 가지는 시간적 물리적 구조적으로 상이하게 대비된다.


행복은 메마른 감정의 단비와 같다.
스며들지만 금새 증발해버린다.


상쾌하다, 자랑스럽다, 신난다, 포근하다, 만족하다, 뿌듯하다, 기쁘다, 사랑스럽다.

행복은 단순하다. '그냥 좋다' 이물감없는 1차원적 감정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거짓없고 순수한 감정으로 투명하다. 쉽게 다가오는 대신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땅속에 빗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수분을 충족시켜주지만 오래 저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생은 이 짧은 순간의 행복 때문에 존재하며 살아간다.


불행은 감정의 파도와 같다.
한번 마음을 내어주면 계속 들이친다.


원망, 후회, 슬픔, 화남, 약오름, 질투, 서운, 쓸쓸함, 얄미움, 막막함, 아픔, 불안, 우울.

행복과 대조적으로 불행은 전조증상이 반드시 존재한다. 타 감정으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의 감정에서 시작해 두 세가지 혹은 더 많은 감정들로 전이되서 결국 불행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보다 고차원적이고 복잡하다. 파도처럼 마음에 계속 밀려들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감정이 불행인지 모를 때가 많다. 또한 감정이 해결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행복의 유사단어보다 종류가 많고 다양하다.




육아를 하는 지난 4년의 시간동안 거의 모든 불행의 감정을 거쳤다. 정확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고, 각각의 감정들이 드는 이유를 알고, 개별적으로 해소를 하는데만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육아 내적으로 짜증나고, 화나고, 아팠다. 이런 고단함의 감정은 왜 나만 홀로 감당해야하는가? 가족과 사회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 질투, 얄미운 감정으로 전이됐다. 급기야 나는 혼자라는 외로움과 불안, 막막함과 우울감으로 도착했다. 물론 감정들의 사이 사이마다 아이에 대한 만족감, 포근함, 뿌듯함을 비롯한 기쁘고 사랑스러운 행복들로 채워졌다. 그 것 때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불행이 찾아왔고 불행도 잠시 행복이 찾아와 불행을 잠식시켰다. 행복과 불행의 감정은 마치 햄버거 패티처럼 겹겹이 쌓여 입에 넣기도 힘든 빅버거(Big Bugger)가 되어있었다. 그러므로 '육아가 불행했다'로 단순히 정의 내릴 수만도 없고, '행'과 '불행'처럼 마음의 문제라 치부할 수만도 없는 꽤 난해한 것이었다.

행복과 불행 두 가지 유일한 공통점은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불행이든 행복이든 표가난다. 아이의 얼굴에 비친 엄마란 사람의 내 모습은 행복과 불행이 하루에도 수십 번 오갔을 것이다. 횟수는 줄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감정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동물이니까. 다만, 내 감정이 이랬다. 정의내릴 수 있으면 만족한 삶이다.



이제는 이유거리 대신
감사거리를 찾아야 할 때이다.



감사와 기도는 진정 자유로워짐이다. 겸손해지면 모든 것이 감사하고, 감사하면 괴로움이 다 뒤로 물러난다. 진정 감사하면 걱정이 사라진다. 내가 낮아져 겸손해질 때 얻어지는 축복이다.
-신현림 작가
만종(The Angelus, 1857~1859), JEAN-FRANÇOIS MILLET

장프랑수아 밀레는 그림재능으로 장학금을 인정받아 파리로 진출한다. 그러나 당시의 화풍에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바르비종 외곽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게 되는데 이 때 인생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사실주의 작풍의 폴 들라로슈의 영향을 받아 농민생활의 현실적인 모습과 자연풍경을 그리게 된다. 당대 유행했던 정치적이고 화려한 고전낭만파와는 다른 길을 이 때부터 가게 되는데. 어쩌면 자식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현실과 이상의 대립이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꿈을 포기하지 않는 셈이다. 덕분에 현 시대의 많은 이들의 삶이 위로받고 있다. 밝음과 어둠, 흑과 백 명암의 대조 속에 기쁨과 슬픔, 고단함과 감사함 두 가지가 공존하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의 현실적 삶이 반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고된 삶으로부터의 휴식. 노동의 경건함과 숭고함. 잠시 신발을 벗은 채 자연과 하나가 되어 꿀잠을 잘 수 있는 소박한 삶. 그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과거에는 육체노동이 주를 이루었고 현대에는 정신노동에 더 시달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과거에도 부르주아와 서민의 삶이 흑백으로 나뉘었고 현세에도 보이지않는 계급은 존재한다. 다 포기하고 귀농 귀촌하는 것이 답이 아니다. 농사일의 현실은 또 각박하기만 하다. 과거보다 살기 좋아졌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데 뭐가 힘들고 팍팍하냐 나무랄수도 있다. 어느 것이 더 힘든지 따지는 것은 흑백론과 같다. 그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과거든 현재든, 돈이 있든 없든, 각박하든 편하든 삶을 정의 내리는 건 자신의 몫이고 각자가 고민해 볼 과제이다.


중요한 건, 볏집이건 소파건 하루의 노곤한 몸을 튀근 후 뉘울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돌봐줄 조부모가 있어도 베이비시터를 고용할 형편이 안되도 육아가 힘든 건 같다. 다만, 아이의 건강한 울음과 웃음에 잠시 삶의 괴로움을 내려놓는 일은 놓치지 말고 행해야한다.


당연한 일들로 치부했던 것들에 감사하는 일, 이 잠깐조차 얼마나 귀중한 시간인지 깨닫는 일을 소홀히 한 것이 어쩌면 힘든 이유이지 않았을까? 육체적으론 힘들어도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은 이유는 그래도 삶이 존재하니까, 하루 하루의 삶 자체가 존귀함을 과거 선조들은 알았으리라. 이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지만 밀레의 그림에서 옛 어른들이 떠오르는 이유일지 모른다. 힘든 것에 치중한 나머지 더 많은 감사한 일상의 순간들을 놓치고 산 건 아닌지 반성했다.






책장에서 오래된 노트 한 권을 꺼냈다. 페이지를 뒤적여보니 마지막 감사기도를 쓴 날짜는 2017년 1월 이었다. 4년간 행복을 멀리하고 불행이란 친구를 사귀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는 누군가가 진정 바라는 오늘이다.'


진정 그렇단 말인가? 얼마 전 브런치 작가님의 제목에 낯이 뜨거웠다. '제발 일상의 행복이란 말 좀 쓰지 마세요!'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아픔과 고통을 겪고 불행을 사는 분들이 많다. 암 투병을 10년 째 이어가면서도 덤덤히 삶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분들을 만났다. 그들의 삶을 감히 안다고 할 수 없었고, 힘내라 어설픈 위로는 독이 될 뿐이었다. 그랬다. 육아에 지쳐 칭얼대는 내 모습은 사치였을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불행을 담보로 일상에서 무수한 도피처를 찾는 사람마냥 행복을 대출받고 있었던 것이다.



육아는 '불행복(不幸福)'도 '복불행(福不幸)' 도 아니다. 행복하지만도 아니하고 복이 오거나 안오거나 막연한 '운수'에 맡기는 것도 아니하다.
'불행과 행복'은 '행과 불행'과 같이 한 끝 차이다.
감사심(敢死心) 으로 감사(感謝)하는 것이다.

*감사심: 죽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마음



정의를 내리고 마침표를 찍는데까지가 상처치유의 마무리다. 그 후에야 비로소 감정이 해소될 수 있다. 이제 치유의 차례였다.



육아란 수제 햄버거에 소스를 뿌려먹자!



'축구는 최대 90분이면 경기가 끝난다. 하지만 육아는 종료휘슬이 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더 힘들다.'


7개월 후 나는 답을 찾았다. 육아는 원래 힘들다. 체력좋기로 소문난 축구선수 박지성도 인정했다. 그러므로 이유를 찾지 말자. 육아가 왜 힘든가? 육아는 원래 힘든 것이었다. 이유가 없는데 찾으려 했으니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그러나 이 또한 의미있음에 만족한다.


논두렁에 애를 두고 밭일하던 그 때는 그 때 일이다. 지금은 초 단위로 많은 정보들과 환경들이 변하는 시대다. 하물며 이 급변하는 시대를 버티는 내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21세기에 18세기 환경을 논하지 말라. 21세기에 맞는 육아법을 찾으면 될 일이다. 가족, 공동체, 사회, 전 지구상의 온갖 구조와 시스템에 이유를 찾기보다는 이제는 벗어나와 내가 만든 햄버거를 맛볼 차례였다. 불행과 행복의 두터운 햄버거 패티에 보다 맛있는 소스를 뿌릴 차례가 다가왔다. 곁들일 감자튀김도 튀겨보자! 나만의 수제 햄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먹고 다시 일어서면 된다.



논두렁에 애를 눕혀 놓고 일할 수 없지만

공원에 자유롭게 뛰놀게 할 수 있다.

할미 하부지가 애를 봐줄 수 없지만

도우미 시터에게 맡길 수 있다.


이 마저도 할 수 없다면

다 잘하려는 책임을 1그램 덜어내면 낫지 않을까?


맘카페와 SNS를 끊어보는 것도 방법이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에 눈 쏠림 대신

옆집 엄마 아들 딸 학원에 귀 쏠림 대신

소신과 철학을 가지려 노력하는 것

다양한 삶만큼이나 백지에 다양하게 그려보는 것

나와 아이를 믿어보는 것


엄마란 존재가 대단한 걸 해주는 것이 아닌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존재임을

깨닫고 옆에 묵묵히 있어주는 것


엄마로서 충분히 잘 하고 있다고

아이에게 사랑받을 자격 있는 부모임을

스스로 믿는 것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이제는 빠져나와 유영할 때이다.




답은 내안에 있다.

몇 년만에 초를 켰다. 조명을 끄고 적당한 어둠 사이에서 마음을 밝혔다. 마치 생각의 결론은 내려는 의지처럼 보였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치고 내면의 소리에 집중했다.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담담히 오늘 하루 감사한 일을 써내려갔다.


일주일의 하루, 온 가족이 모여 식사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하루의 끝 아이때문에 웃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경력의 쉼 어쩌면 지난과거에 대한 보상이겠지요.
따스한 햇살에 발 부비며 파도소리 들을수 있음에 감사해요.
오늘하루 따뜻한 전기장판에서 몸을 뉘이고 일어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2021년 1월 23일 짓다

2021년 2월 21일 매듭


어느 날 오순이 작가님의 댓글이 내 마음에 날아왔다.

쉽사리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왜일까? 고심했다.

6개월만에 그 답을 찾았다.




양치는 소녀와 양떼들 (1863년), JEAN-FRANÇOIS MILLET





*장 프랑수아 밀레

그림1. 낮잠, 1866

그림2. 아이에게 죽을 떠먹이는 여인, 1867

그림3. Feeding the young, 1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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