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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울림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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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서기 Jun 23. 2021

시선으로부터,

시작되었거나, 사라졌거나,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다.

최근 성북구 한 책 최종후보도서 4권이 발표되었다. 나도 성북구 한 책 추천도서를 구글 설문지로 제출했었는데, 안타깝게 내가 추천한 책은 최종후보에 들지 못했다. 대체 어떤 대단한 책들이 최종후보로 선정 되었는지 기대하며 뚜껑을 열어보았는데 내가 모르는 책들 뿐이었다. 그렇게 내가 전혀 모르는 최종후보도서 4권과 마주하고나니 그동안 책읽기에 게을렀구나 싶어졌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한 달에 한 권씩 최종후보도서를 독파해보기로 했다.    


△『시선으로부터,』(정세랑), △『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 △『유원』(백온유), △『천 개의 파랑』(천선란)


우선 내가 선택한 책은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였다. 이 작품은 제목에 '쉼표(,)'까지가 풀네임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 이 책을 소개할 때는 '시선으로부터 쉼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느낌적인 느낌으로 '시선으로부터'라고 하고 잠깐 을 들이는 방법이 있겠다. 그럼 제목에 굳이 쉼표를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첫 페이지를 열게 되면 놀랍게도 가계도와 마주하게 된다. 심시선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진 가계도는 그녀가 했던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생겨나고 맺어진 가족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것과 마주하는 순간, 이 작품은 생각보다 복잡하겠구나 싶어졌다. 왜냐하면 대체로 가계도가 첫 페이지에 있는 작품들은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이름도 헷갈려서 읽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마르케스 작가의 백년의 고독이 떠오른다. 그놈의 아우 렐리아노는 왜 그리도 많았던가...) 어차피 가계도를 한 번에 다 외우지는 못하기에 대충 두 번의 결혼을 했고, 자식손자 손녀들이 있다는 정도만 인식하고 페이지를 넘겼다. 


엄마 제사를 지내야겠어. 

작품은 심시선의 첫째딸 명혜의 선언으로 시작된다. 나름의 역사와 스토리를 가지고 모계 중심의 가정을 이루어낸 심시선은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명령(?)을 하였는데, 큰 딸이 십주기를 맞이하여 갑자기 제사를 지내야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이에 큰딸 명혜의 성격을 아는 가족들은 쉽게 그 뜻을 거스르지는 못하면서 굳이 제사를 지내야 하는가에 대해 에둘러 말한다. 


우린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낼 거야. 

그리고 이러한 엉뚱한 선언은 실제로 이어져, 온 가족이 하와이로 떠나게 된다. 어째서 굳이 제사를 하와이에서 보내려는 것일까? 그것은 심시선이란 인물이 지나 온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면 너무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렇다고 그 시간을 여기에 모두 서술할 수는 없기에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심시선은 하와이에 있는 농장에서 일하던 여성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마티아스라는 화가를 만나게 되고, 그를 따라 독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자신에게 어떤 새로운 기회세상을 줄 것 같이 말하던 마티아스는 너무도 폭력적으로 그녀를 소유화한다. 그가 주최하는 파티의 처음과 끝에는 그녀가 있지만 파티의 중간에는 그녀가 있을 곳이 없었다. 또한 심시선 이전에 꽤 많은 여성들이 이미 그 자리를 거쳐갔다는 것을 독일어와 함께 배우게 된다. 그녀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납작 엎드리면서 마티아스의 비위를 맞추었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요제프 리를 만나 거처를 옮기게 된다. 하지만 이를 곱게 보낼리 없던 마티아스에 의해 두 사람은 예정에 없던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심시선은 고국인 한국에 적응하며 뿌리를 내렸지만 요제프 리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고, 그녀는 홍낙환이라는  사내와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되면서 첫 페이지의 가계도를 완성한다. 이렇게 심시선의 역사가 시작 된 곳. 그리고 비극적 역사에 의해 돌아갈 수 없었던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야 했던 것이다. 


엄마는 자살할 사람이 아니었어. 지지부진한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건 맞을지 몰라도 그건 자살이 아니었어. 나는 엄마를 믿었는데, 어째 친딸 친아들들이 너무한 거 아니야?


심시선은 생일 바로 다음날 심근경색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를 두고 너무나 극적인 타이밍이라 여긴 친자식들은 혹시나 그녀의 죽음이 의도된 선택이었는지에 대해 의심한다. 하지만 친딸이 아닌(두 번째 남편 홍낙환의 딸) 경아는 절대 자살일리가 없다며, 아는 의사의 소견까지 가져와 자살이 아님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이렇게 계속 경아가 친딸이 아님을 상기 시키는 부분들이 반복되며 표현되는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부분들이 나올때마다 독자인 나는 심시선이 경아를 너무도 당연히 친딸로 여겼음을 느끼게 된다. 


손님들이 꼭 오빠만을 두고 '크게 될 놈'이라고 칭찬했거든요. 어느 날 엄마가 그게 싫었는지 매번 반복해서 말하는 손님한테 "그럼 우리 딸들은요? 작게 될 년들인가?"하고 확 무안을 줬어요. 그때 제 어깨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딸들'에 제가 포함된다는 걸 알았고 기뻤던 기억이 있어요. 


이 작품은 총 31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 챕터가 시작하기 전에는 심시선이 썼던 글, 인터뷰, 일기 등이 소개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조각들이 일관성있게 흐르면서 커다란 스토리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심시선의 조각들은 그녀를 굉장히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어내고, 책의 페이지를 덮고 나면 가장 먼저 선명하게 떠오르는 인물로 완성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이 작품의 제목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가족들은, 오전부터 바삐 집을 나서거나 구석에서 마지막 마무리를 하며 도사렸다. 별것 아닌 일에 진심을 다해 도사리는 것이 이 집안 사람들의 공통점이구나 서로 헛웃음을 웃으면서도 끝까지 그랬다. 


나는 위의 문장을 읽기전까지, 주인공 이름과 제목의 상관관계를 느끼지 못했다. 당연히 외부 시선으로부터 오는 그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위의 문장을 읽고 나서야 제목과 쉼표가 이해 되었다. 그것은 20세기를 살아 온 여성 심시선으로부터 시작된 혹은 끝난 그 무엇이다. 그것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선으로부터 시작된 가계도이거나, 시선으로부터 변한 억압의 시대거나, 시선으로부터 내려 온 사랑일 수도 있는 것. 작가는 이것을 명명하지 않은 채 생략해버렸다. 하지만 생략되었음을 표기해 놓은 것. 그것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지난 시간이 있음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이렇게 심시선을 중심으로 펼쳐놓은 리뷰글을 본다면 다소 이 작품이 무겁다거나 어려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있다. 정세랑 작가는 [보건교사 안은영]을 쓴 작가라는 것. 작품의 톤 자체는 굉장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드라마 형식을 가지고 있다. 큰딸 명혜가 제시한 제사의 방식은 하와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와서 제사상에 올리는 것으로, 각 가족들이 제사상에 올릴 그 무엇을 찾는 모습이 무척 재미있게 그려진다. 다만 그 안에 각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고민들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공감과 응원, 그리고 반성을 불러일으킨다. 


할머니의 팔뚝 바깥쪽엔 흉터가 남았었다. 염을 할 때 보았다. 그 희미한 흉터를. 20세기에 생겨 21세기에 불타 사라진 흉터에 대해. 


작가의 말에는 농담 하나와 비극 하나로 시작 된 작품이라고 적혀있다. 이말처럼 이 작품의 을 잘 설명한 것도 없다. 농담 하나와 비극 하나. 그 묘한 경계, 혹은 드라마가 조각나있다. 그것은 이 작품을 빠르게 읽지 못하는 지점이기도하다. 한 챕터가 끝나고나면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싶게 하는 것. 띄엄띄엄 심시선 가족들의 조각들과 만나는 호흡을 만들어내는 것. [시선으로부터,]라는 작품이 가진 특별한 힘이었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31개의 조각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그리 두껍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배경인 하와이의 다양한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어 여행을 가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날이 좋은 요즘, 어딘가로 긴 호흡을 가진 여행을 가고 싶어질 때, 이 작품을 읽기를 추천한다. 도넛이나 팬케이크를 옆에 두고 읽으면 더욱 좋다. 



해당 글은 성북문화재단 뉴스레터 기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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