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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울림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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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서기 Jul 02. 2021

천 개의 파랑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파랗게 물들었다

왼쪽부터 △『시선으로부터,』(정세랑), △『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 △『유원』(백온유), △『천 개의 파랑』(천선란) - 성북구 올해의 한 책 최종후보도서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1. 아동청소년이 주인공으로 어른들에게 감동과 깨우침을 주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2. 우리들은 놓치고 있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캐릭터

3.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너무도 익숙한 드라마


천선란 작가의 [천 개의 파랑]에는 놀랍게도 이 모든 것들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이 작품을 내가 너무도 재미있게 읽었다는 것이다. 그냥 재미있게 읽은 것도 아니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받아가며 페이지를 넘겼다. 다시금 되새기고 싶은 문체라던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캐릭터는 아닌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의 흐름으로 긴박함을 주지도 않는데, 익숙하고 편안한 따뜻함이 녹아 있었다.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흘러간다는 이론에 대해서는 연재가 말해줬어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것이라고요. 제가 투데이와 함께 달릴 때 느꼈던 시간이 접힌 듯한 현상은 실제라고요. 생명은 각자마다 삶의 시간이 다른 것 같아요. 


아주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인지와 학습 능력이 가능한 칩이 들어간 휴머노이드 콜리. 그는 연재와 보경 그리고 은혜와 지내면서 다양한 질문들을 던지고 거기서 얻은 답들을 조합한다. 연재에게 들었던 답을 보경의 질문에 답하는 데 사용하기도 하고, 보경의 말을 인용해 은혜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어쩌면 이들에게 콜리는 일종의 음성 사서함 인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주었다면 멀어지지 않았을 거리. 하지만 이미 멀어져 버린 거리. 가족의 모습이었다)  


콜리가 지냈던 그 집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고 고요했다. 세명이서 사는 집이었지만 각 시간대별로 1인분의 소음만 발생하는 곳이었다. 함께 있지만 맞물리지 않는 각자의 시간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콜리는 그 침묵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조금씩 균열이 생기며 서로에게 스며든 소음이 서로의 시간을 맞춰줄 거였다. 


세 모녀가 한 집에서 살아가지만 '너무 바빠서', 혹은 '서로에게 상처를 줄까 봐',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이 있어서 가깝게 지내지 못한다. 서로를 생각하면서도 꺼내지 못하는 말들, 서로가 주고받지 못한 대화들로 묘한 거리가 생겼고 그곳에 휴머노이드 콜리가 들어오면서 변화가 생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우연하게 만난 로봇에 의해 멀어졌던 가족이 재결합하고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라는 식의 작품만은 아니다. 이런 요소도 들어 있을 뿐이다. [천 개의 파랑]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작가의 말에 담긴 문장인 듯하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작품의 배경이 경마장인 것은 이유가 있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더 빨리'를 외치고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값'이 매겨지는 곳. 작품 속 콜리는 원래 기수로 만들어진 휴머노이드였다. 사실 나도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경마장에서 말들은 지금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 위에 타고 있는 사람 때문에 말의 속도는 제한을 받는다. 낙마로 인한 인명 사고와 인간의 체중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에는 기수를 사람이 아닌 로봇, 즉 휴머노이드가 하게 된다. 오직 기수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것들은 50kg 미만으로 무게는 가벼우면서도 낙마를 해도 아무도 죽지 않고 그저 휴머노이드 하나가 부서지는 것뿐이다. 


민주가 달리라는 신호를 말에게 보내자 말은 서서히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관절부터 발목까지 이어진 링크구조의 하체는 콜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 반동을 흡수하며 위아래로 움직였고 엉덩이에 설치된 유압기는 안장에 닿는 충격을 줄였다. 투데이가 콜리의 존재감을 최대한 느끼지 않게끔 설계된 몸이었다. 


콜리는 경마장에서 투데이라는 말과 이 된다. 그런데 콜리에게는 특이점이 있었는데 바로 자꾸 말과 교감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말들을 관리하는 민주가 말의 목을 쓰다듬는 것을 보고 그것을 콜리가 따라 하는 것인데, 민주는 그런 콜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 그렇게 교감하는 팀이 된 콜리와 투데이는 경마장의 에이스가 되어 높은 몸값을 받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 말은 그만큼 찾는 곳이 많아졌다는 것이고, 3살 밖에 되지 않은 경주마 투데이는 결국 연골이 다 닳아 없어져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몸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콜리는 그런 투데이가 진통제의 힘으로 계속 달리다가는 죽어버릴 것이라 여겨, 경기 도중 스스로 낙마를 한다. 콜리가 찾은 투데이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경기 도중에 떨어졌는데 바로 뒤에 오던 선수에게 밟혔어요. 제 실수죠. 딴생각을 하면 안 됐는데 문득 하늘이 푸르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다름을 연재도 느꼈을 것이다. 민주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서도 콜리를 모르는 척할 수 없을 연재를, 그리고 끝내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내놓으며 콜리를 사겠다고 말하리라는 것을. 


연재는 언니 은혜를 찾아 경마장 안에 들어왔다가 하반신이 부서져 건초더미 위에 누워있는 콜리와 만난다. 그리고 그가 다른 휴머노이드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고, 자신의 전재산을 주고 콜리를 손수레에 싣고 집으로 돌아간다.  


몸이 다 망가진 채로 건초더미에 누워서 나한테 하늘이 예뻤다고 말하는 네가 불쌍했어. 그리고 순간 내가 너를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호기심도 들었어. 그대로 내버려두면 너는 사라지겠지만 내가 데리고 오면 사라지지 않으니까. 같잖은 연민이지. 그래도 후회 안 해. 나는 내가 좋아했던 걸 그동안 싫어한다고 믿고 살았는데, 아니더라고. 너 만지면서 알게 됐어. 그리고 지금 내 말에는 대답하지 마. 명령이야.


고장 난 휴머노이드 콜리를 수리해주고 다시 경마장으로 그를 보내기 전, 연재는 자신을 왜 데리고 왔는지 묻는 콜리에게 진심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콜리는 투데이와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경기장에 들어가고 작품이 끝난다. 내가 스토리에 대한 정보를 이 글에 더 담지 않는 건, 드라마의 흐름이 사실 너무나 예측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익숙하고 많이 본 듯한 드라마의 방향이 이 작품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익숙한 것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 여기에 작가의 매력이 있는 것인데 나는 일단 표현들이 너무 정직해서 좋았다. (한 챕터만 더 읽어야지 하면서 읽다 보면 두 세 챕터가 넘어갔다)


행복에 휩싸인 연재의 몸이 진동으로 떨렸다. 연재는 살아 있었다. 늘 살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었다. 무엇이 연재를 이토록 가슴 뛰게 만드는 것일까. 투데이처럼 달리는 것도 아니고 저 작은 화면에 기계를 구상하고 있을 뿐인데. 


콜리는 도면을 그리고 기계를 만지는 연재를 보며 빛난다고 표현한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열을 감지할 수 있는 콜리의 눈에는 보이는 그 빛. 연재는 사실 그다지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인물이다. 휠체어를 탄 언니 때문에 엄마의 관심은 온통 언니에게로 가 있었고,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로봇 관련된 일은 유학을 다녀오고 세상을 넓게 사는 학생들에게 밀려 그 기회를 가지기 힘들었다. 그렇게 무관심과 무뚝뚝으로 뭉쳐져 있던 연재에게 빛이 난다고 말해주는 존재. 그것이 콜리고 작가였다. 


한 해 1만여 마리 정도의 동물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을 감았다. 인간도 살기 비좁은 땅이라는 이유로 동물들이 사라져야 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생태계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모두가 입을 모아 동물의 생존권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중 대부분의 인간들이 여전히 개 공장에서 태어나 팻숍으로 팔러 온 강아지를 구매했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를 발로 찼다. 


 [천 개의 파랑]은 악인 캐릭터가 없다. 굳이 있다면 경마장에서 승부조작을 하는 인물이지만 그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잘못된 사회의 형상화다. 대체적으로 이 작품에서 시련과 장애를 주는 역할은 하나의 인물이 아닌 사회와 시대가 담당한다. 동물의 생명을 값과 편리로 치환하는 사회적 분위기. 휠체어를 탄 사람을 불편해하는 사람들, 돈만 있다면 걸을 수 있는 누군가가 계속 휠체어에 앉아 있어야 하는 자본주의 등 주인공들을 괴롭히는 것은 하나의 개인이 아니다. 물론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세 모녀의 모습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악인이 아닌 이해를 구하는 아픔이었기에 결국 나중에서 다가감으로 마무리된다.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당신이 말했던 그리움을 이기는 방법과 같지 않을까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남편을 화재로 잃은 보경, 휠체어에 앉아 지내는 은혜, 그 무엇에도 아무런 기대 없는 연재. 세 사람 각자의 드라마를 보는 재미부터, 휴머노이드 콜리와 연골이 다 닳아 없어진 투데이가 건네는 위로. 그리고 우리가 지금을 살아가며 생각해 봐야 하는 사회적 모습까지. 이 모든 것이 멋지게 어우러져 달려가는 작품. 하지만 콜리가 그랬던 것처럼 페이지를 덮으면 내 삶의 호흡을 가다듬게 되는 작품. [천 개의 파랑]은 그런 작품이다. 특히나 여기서는 인용하지 않지만 제목이 등장하는 문단은 많은 울림을 주었다. (책을 통해 전달받을 감동을 위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파랗게 물들었다. 



 


해당 글은 성북문화재단 뉴스레터 기고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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