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하고 꿈꾸던
그런 곳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요. 상상으로만 볼 수 있었고 상상으로만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상상으로만 느낄 수 있는 곳이요. 너무 멀었기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그런 곳이요. 여러분도 그런 장소가 하나쯤은 있으신가요? 상상하고 꿈꾸던 장소요.
그곳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하나였어요. 영화에 나왔던 장소였기 때문이에요. ( 누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덕질이라고 말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팬심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 혹시 『500일의 썸머』 본 적 있어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제가 왜 이 영화에 빠지게 되었는지 먼저 이야기를 해볼게요.
20살때 저는 굉장히 우울했어요. 원하지 않는 학과와 생각했던 것과 달랐던 대학 생활, 부모님 곁을 떠나고 절약이란 것이 무엇인지 뼛속까지 깊게 느낀 자취생활, 게다가 처음 느껴보는 추위... 혼자 하는 것들이 모두 낯설고 힘들었어요. 그래서 항상 맥주를 마시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글을 끄적거렸어요. 우울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많이 적었고 현재를 부정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계속 과거의 일들이 그리운 거예요. 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시간이 그립고 고등학교가 그립고 옛 친구들이 그립고 옛사람들이 그리운 거예요. 그래서 계속 뒤돌아봤던 것 같아요. 그렇게 저는 현재에 존재하지 않고 자꾸 과거에 존재했고 과거의 것들과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옛 여자친구들에게도 그리움이 피어나기 시작했어요. 몇 번이나 전화기를 붙잡고 통화버튼을 눌렀어요. 하지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후에 밀려오는 우울함의 파도가 저를 덮쳤고 저는 그 파도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죠. 그래서 연락을 하지말고 참아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하지만 마음처럼 잘되지는 않았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우울할 때마다 봤던 영화가 『500일의 썸머』 였어요.
『500일의 썸머』를 처음 본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말해요.
" SUMMER가 나쁜년이네 "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때의 제 모습은 TOM보다는 SUMMER에 가까웠어요. 사람들의 말에 저항하고 싶어서 영화를 몇 번씩 보며 SUMMER가 나쁜 년이 아닌 이유를 찾고 TOM이 잘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봤어요. 그랬더니 영화가 다르게 보이는 거예요.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말이죠. " THIS IS NOT A LOVE STORY "라는 대사를 그제서야 이해했어요. 이 영화가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와 다른 이유는 어떨 때는 내가 SUMMER였고, 어떨 때는 내가 TOM이었어요. 그 이후로 제가 여자와 감정적으로 문제가 생기거나 헷갈리거나 고민이 생길 때, 항상 『500일의 썸머』영화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죠.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 영화를 보았고 그러다 보니 50번도 넘게 본 것 같네요. ( 요즘도 가끔 봐요. ) 아래 장면들은 영화를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새기는 대사들이에요.
전 제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어요. 인간관계는 혼란스럽고 사람들은 마음을 다치죠. 누가 그런걸 필요로 하겠어요. 우린 아직 젊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한 곳에 사는데. 즐길 수 있을 때 즐기고 심각한 문제는 나중으로 미뤄야죠.
있잖아 난 가끔 날아가는 꿈을 꿔. 처음엔 달리는 것 같아. 정말 빠르게 꼭 초인 같아. 그리고 점점 가프르고 험한 곳으로 변해가. 그러면 난 너무 빨리 달려서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되는거야. 그리고 나는 떠다녀. 너무나 생생해서 놀라울정도로 자유롭고, 안전하게 그러다 실감하는거야.
난 완벽하게 혼자라고. 그리고 깨어나.
운좋게 올해 미국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고 LA에서 『500일의 썸머』를 찍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영화에 나왔던 장소를 찾아봤어요. 많은 장소들 중에 정말로 가보고 싶은 곳이 한군데 있었어요. 영화를 집중해서 봤다면 이 장소는 모두들 아실 거예요. 이곳에 앉아서 TOM이 혼자 있었을 때 들었던 감정과 SUMMER와 사랑을 나누며 함께 있었을 때의 감정과 SUMMER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만났을 때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LA에서 이곳에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무조건!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은 막혀있었어요. 출입금지 표지판이 붙어있었고 그곳에 들어가있는 사람이 없었죠.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어요. 매일매일 숙소에 들어가기 전, 이곳을 들려서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죠... 아니 지금 내 눈앞에, 내가 어릴 때부터 꿈꾸어왔고 상상해왔던 곳이 있는데 다가갈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서글펐어요. 잔혹했고 밉기까지 했고, 담장을 넘을까 말까 수도 없이 갈등을 했어요. 그렇게 속앓이만 하다가 LA에서의 마지막 날이 왔고 ‘도저히 이대로 LA를 떠나서는 안 되겠다. 이렇게 가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또다시 이곳 주변을 서성거렸어요. 그런데! 어떤 커플이 담장을 넘고 들어가는 거예요. '어 뭐지? 들어가도 되나? 경찰이나 관리인이 오는가 지켜봐야겠다. ' 그렇게 상황을 살피는 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커플을 핑계대며 저는 담장을 넘어서 저곳으로 넘어갔어요. 그리고 사진 한 장 '툭' 찍고 나니, 제 모든 체증이 시원하게 사라져 버렸어요.
수없이 갈망하고 원했던 것을 직접 내 두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영화에 나왔던 장소에 가보는 것은 의식과도 같다. 내가 영화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 그 기분은 짜릿하다 못해 저리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조금씩 변태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어, 이런 짜릿함을 한 번 느끼기 시작하면 이 맛에 중독되어 버린다. 상상해보아라. 이 광경을 보고 있다가 뒤를 돌아보면 벤치에 TOM과 SUMMER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띠고 있을 것 같지 않은가? ( 나만 그런가 )이 곳 말고도 영화에 나왔던 다른 곳에 가도, 내 옆에는 영화 주인공들이 있어 그들과 교감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맛에 영화에 나왔던 장면들을 찾아다닌다.
만약 당신도 가고 싶은 곳이 있거나 상상하고 꿈꾸던 곳이 있다면 일생에 한 번쯤은 꼭 가보기를 바래요. 가서 그 순간을 담아오면, 그 순간을 기점으로 나의 감정의 무언가에 변화가 온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