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발치에서
솔직히 말할게요. 그리워요. 그런데요 ... 더 솔직히 말하면,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이 그리운거예요. 당신이 그립지는 않아요.
당신과 같이갔던 장소가 그리운거예요. 당신이 그립지는 않아요.
그렇지만요 ... 당신이 없었다면 그 시간과 장소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존재하지도 못했을 시공간이었을텐데
화려했던 기념일보다 맛있게 먹었던 비싼 스테이크와 와인보다 더 진하게 남아있는 추억은 아주 사소한 것에 있어요.
에스컬레이터에서 마주보며 내려가다 옷을 매만주어 줄 때
아침 느즈막히 일어나 맛있는 것을 해주겠다며 혼자 재료를 사와서는 요리를 하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배고팠지?" 라며 몽롱한 나를 부를 때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다칠뻔 했다는 말을 듣고, 말없이 미끄럼방지 스티커를 타일에 붙여 놓은 것을 보았을 때
한강으로 소풍가자며 통화를 하곤 우리집 앞까지 와서 함께 자전거를 타고 눈부신 햇살을 스치며 달려가 돗자리를 펼 때
그러곤 오랜시간 전부터 준비하고 요리한듯, 온기가 남아있는 양파스프를 도시락 통에서 꺼낼 때
푸르스름한 새벽에 부시시 거리며 깨더니, 조용히 내 볼에 입맞추고 다시 잠자는 모습을 봤을 때
옥탑방에서 밤하늘에 빛나는 불꽃놀이를 보며 불꽃놀이보다 더 반짝거리는 두 눈으로 다가오는 휴가 때 어디서 뭐하고 놀지 우리나라 전국의 도시를 읊어대던 당신을 볼 때
추운 겨울 오뎅바에서 나는 자몽맛 소주를 마시고 당신은 따스한 사케를 마시며 서로의 바닥까지 보여줬을 때
가끔 서로 술에 취해서 나쁜 얼굴로 각진 언어를 골라 내뱉고, 울며불며 아파하다가 말없이 꼭 껴안고 싱글 침대에서 팔베개와 서로의 발을 포개어 잠잘 때
그런 추억을 이제는 먼 발치에서 바라보네요. 당신이 나를 인지할 수 없는 거리에서,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바라봐요. 바라본다기보다는 상상하는거죠. 그때 그곳에서는 그랬구나.... 그렇게 그리워만해요. 지금 그 시간 그 장소에 간들 당신은 없을테고 어쩌면 당신과 닮은 흐릿한 그림자만 남아있을 뿐. 그렇게 그리워만 해야해요. 그것이 내가 당신을 잊는 방법이거든요.
정말로 당신이 그립지는 않아요. 사실 ... 가장 그리운 것은 당신이 내 사소한 일도 걱정해주던 마음이 그리워요.
당신은 어디가 제일 그립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