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비 개인 숲길을 걸었다. 아직 가을비에 젖어있는 고요한 숲에서, 청량한 공기를 (마스크 없이) 맘껏 누렸다. 가만 보니 젖은 나뭇가지 끝에 작은 고드름이 맺혔다. 아직 10월 중순인데 말이다.
물소리, 나무 소리, 새소리를 뺀 모든 소리가 사라진 조용한 숲 속에 지잉-하고 짧은 진동소리가 울린다. 충남도청에서 보낸 안전안내문자다. 오늘 밤부터 충청도에 한파주의보가 발효되니 겨울채비를 하란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로 주유소에 전화를 걸었다. “ㅇㅇ리 마을회관 앞집인데요, 등유 두 드럼 부탁드려요.” 하고.
트럭 뒤에 커다란 탱크가 붙어있는 웅장한 주유차가 우리집 앞에 등장했다. 긴 호스로 우리집 보일러와 합체하더니 기름을 드릉드릉 넣는다. 그 모습을 담장 너머로 지켜보던 옆집에서 “우리집도 두 드럼 넣어줘요.” 하신다. 그 모습을 건너다보던 앞집 할머니가 “우리집두.” 하고 달려오신다. 가을비가 그치고 바람이 쌀쌀해진 오늘, 온 마을 기름 넣는 날이 되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건너갈 때 잊지 않고 꼭 챙겨야 하는 일이다.
보일러에 기름을 가득 채워두니 마음이 든든하다. 갑자기 기름이 떨어져 밤새 추위에 떠는 장면을 상상하니-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아찔하다. 수확한 감자, 고구마, 양파는 얼지 않도록 실내 창고로 옮겨 착착 쌓아두었다. 작년에는 마당 한 켠에 두고 영하의 추위를 맞아 꽁꽁 얼어버려 두고두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수도 펌프는 헌 옷으로 잘 여며 두었고, 샷시랑 문틈도 한 차례 둘러보았다. 그리고 1,2년생의 어린 나무들은 동사하지 않도록 밑동을 짚으로 감싸고 왕겨로 덮어주었다. 가을에 꼭 해야 하는, 시골집의 월동준비다.
돌아오는 계절에는 내가 뭘 입고, 뭘 먹을 건지, 뭘 누리며 보낼 건지- 이렇게 정성스레 준비해 본 적 있었나.
회사에서는 항상 다음 계절을 미리 준비하곤 했다. 분기로 나누고도 모자라 월간, 주간- 촘촘하게 회사와 팀의 일들을 계획했다. 그럴 때면 나는 아주 부지런하고 철저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 늦은 밤 집에 돌아오면 한 없이 게으른, 또 다른 내가 되었다. 퇴근하면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먹고 마시기 바빴고, 그런 내 옷장에는 정리되지 않은 지난 계절의 옷들이 늘 뒤섞여 있었다.
어떤 질문이든 그 앞에 ‘가장 좋아하는’을 붙이면 답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누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를 묻는다면 OO이라고 대답해야지, 하며 모범답안을 만들어둔 적도 있다. 금방 답하지 못하면 왠지 취향이 없는 사람처럼 여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언제냐는 질문에는 예전부터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었다. 따뜻한 계절, 봄을 가장 좋아하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 질문 앞에서도 머뭇거리게 될 것 같다. 오늘 아침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데 그럼 뭐- 여름이랑 겨울은 꿀리나. 지나간 여름과 겨울에도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라 부를 만한 순간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때에만 누릴 수 있는 것들에 감동하며 나는 또 ‘여름이 최고야’ ‘겨울이 최고야’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 누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가을이라고 답해야지, 하고 미리 생각해 둔다. 왜냐하면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가을이니까. 언제고 지금 통과하는 계절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가을비가 내린 후의 산책을 좋아하고, 가을 특유의 색깔과 냄새를 좋아한다. 매번 새로운 수확의 손맛을 좋아한다. 그리고 다가올 계절을 정성스레 준비하는, 가을날 속의 나를 좋아한다.
가을이 최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