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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향 Sep 14. 2023

2022년 5월 8일

엄마의 목소리

과거 어떤 일에 대해서 기억을 떠올릴 때 동영상을 보듯 그 과정을 떠올리는 편이다. 예를 들면, 사무실에서 누군가에게 빌려준 물건이 시간이 지났는데도 제자리에 없을 때 빌려준 시간부터 그 뒤의 시간들을 되돌려 본다. 그럼 그 물건이 언제 들어오고 다시 나갔는지, 마지막으로 빌려간 사람이 누구인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보면 범인(?!)이 나온다. 그렇게 떠올린 기억은 대부분은 틀리지 않고 명확하다.


학창 시절 암기과목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떤 사건에 대한 기억력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독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잘 없다. 드문드문 생각이 나는 것들은 사진으로 보거나 주변에서 해준 이야기 덕에 기억을 하는 건지 진짜 내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부정적인 감정을 아주 강렬하게 남긴 일은 오랜 시간 나를 묶어두기도 했는데 반대로 즐겁고 행복했던 감정의 시간들은 다 흘러가버린 것만 같다.




엄마를 보낸 후에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병원에서 선고를 받고 한 달의 시간 속에 있는 엄마의 모습만 계속 떠올려졌다. 살이 빠져 몸이 반쪽이 된 엄마의 모습만이 떠올려지고 숨을 거두기 6-7시간 전에 봤던, 숨을 쉬고 있는 엄마를 마지막으로 봤던 그 시간만 계속 떠올려졌다. 집에서의 엄마 모습도 그렇다. 분명 건강하게 보낸 시간이 더 많았을 텐데도 워커를 끌고 다니며 생활하던 엄마의 모습만이 떠올려졌다. 8년 넘게 투병하는 동안도 분명 덜 아프게 있었던 시간이 있었을 텐데도 기억 회로가 고장이 났는지 건강했던 엄마의 모습이 잘 기억나지가 않는다.


엄마의 대한 기억은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건강했던 엄마의 모습이 생각이 나지 않고 아팠던 모습만 계속 떠올려진다고 했다. 누군가와 이별을 하면 잘해주지 못한 것만 기억난다고 하지만 아픈 엄마에 대한 기억만 이렇게나 남아있다니. 그 기억은 마음에 회색빛을 한 겹 더 칠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제 늦은 저녁, 언니가 녹음파일 하나를 보내왔다. 엄마가 이전에 사용하시던 휴대폰을 둘째 조카가 사용하고 있는데 거기에 있었던 녹음파일이라고 했다. 엄마의 음성이었다. 조카는 그 파일이 휴대폰에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제야 얘기한다며 자기 엄마, 즉 나의 언니한테 얘기를 한 것이다.


녹음된 내용은 작년 어버이날에 내가 대표로 부모님께 적은 편지 내용이라고 했다. 엄마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편지 내용을 엄마의 목소리로 휴대폰에 녹음을 해놓았다. 편지는 어버이날과 엄마 생신 때마다 썼을 텐데 작년에는 왜 녹음까지 할 생각을 하셨던 걸까?   


어떤 내용일지, 엄마의 목소리는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녹음 파일을 열어봤다. 웬걸, 엄마의 목소리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건강하다. 엄마 특유의 씩씩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목소리였다. 기도할 때,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 나오는 평소 말할 때 보다 조곤조곤하고 얌전한(?!) 그 목소리였다.


'그렇지. 엄마도 이럴 때가 있었지.'  


선물을 받은 것만 같다. 다행이다. 엄마에게 아픈 시간만 있었던 게 아니어서 참 다행이다. 한편으론 우리에게,


'엄마는 괜찮다. 괜찮았다. 힘들지만 너희들 덕분에 괜찮았다. 엄마는 이렇게 씩씩하게 있었잖아. 그러니 너무 아픈 것만 기억하지 말고 이쁘고 건강했던 나도 기억해 줘라.'


라고 얘기하는 것만 같다.

   



엄마의 휴대폰을 아직도 정지시키지 못하고 살려두고 있다. 카톡 프로필에는 뜨게 될 ‘알 수 없음‘이라는 단어를 볼 자신이 없었다. 수년간 사용해 왔던 번호가 없어진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았었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사랑하는 이의 상실은 처음엔 온몸을 누르는 바위 같아서 죽을 것 같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바위가 작아져서 주머니 속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돌이 된다. 그래서 문득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마다 생각이 난다고 합니다. 그 돌은 죽을 때까지  항상 지니고 간다고 하네요. “


건강한 엄마의 음성을 듣고 나니 바위가 조금 작아진 것 같기도 하다. 주머니에 넣기까지는 한참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하나둘씩 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했던 기억들은 왜 다 흘러가버리고 아픈 것만 왜 이렇게 꼭 박혀서 남아있나 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게 아닌 거 같다. 행복하고 건강한 시간들이 주머니 곳곳에 담기고, 삶에  알알이 박혀 빈틈을 가득 메워주고 있었다. 그 채움은 지금의 나를 내 삶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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