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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향 Dec 16. 2022

Merry Christmas

잠시 이는 바람

오늘은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엄마의 진료가 있는 날이다. 3년 전 만해도 휠체어를 타야 이동이 가능했던 엄마가 지금은 혼자서 충분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혼자서 서울로 가시는 보통의 날에는 기차역까지 모셔다 드리면서 기차 타는 것을 확인한 후에 집으로 돌아온다. 젊은 시절, 아니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아프시기 전엔 혼자 서울행은 내 인생에는 없으리라 생각했던 엄마의 삶이었다. 그런 엄마가 혼자 열차를 타고 서울을 오가시니 얼마나 대견스러운 일인가.


씩씩한 우리 엄마는 혼자서도 잘한다며 바쁜 자식들 도움 없이 다니시려고 한다. 하지만 자식 맘은 다르지 않은가. 서울에 있는 남동생이 최대한 일정을 맞춰 엄마의 병원 일정에 함께 하지만 오늘은 일정을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최근 컨디션이 안 좋았던 터라 서울 길에는 내가 동행했다.


엄마가 다니시는 병원은 암병원이 따로 있다. 진료실, 각종 검사실, 입원실이 있는 그곳은 자그마치 11층이나 되는 건물이다. 병원에 도착해서 접수를 하고 해야 할 검사를 마치면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된다. 숨을 조금 고르고 오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애달픔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로비 긴 의자에서 옷을 덮어쓰고 자는 사람, 침대가 지겨울 시간 휠체어를 타고 나와 햇볕을 쬐는 사람, 그 휠체어를 정성스레 밀어주는 사람. 대부분의 사람은 환자 본인이거나 환자의 보호자이다. 9년 동안 익숙하게 봐온 광경이 새삼스레 깨달아지면 ‘우리는 동지입니다. 우리는 같은 마음이에요.‘라며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11층 가득, 각자의 무거움을 견뎌야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애처로우면서도 뜻 모를 위로를 느끼게 된다.  5명 중에 3명이 암환자라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암은 여전히 특별하게 비치는 병이다. 그다지 편하지 않은 특별함은 이상하게도 병원 안에 있는 동안은 묘하게 평범해진다. 서로가 가진 암묵적인 유대감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젊은 남자를 보았다. 오늘 했던 치료가 버거웠는지 휠체어를 타고 아버지의 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햇볕 아래 나선 지 한참이 된 얼굴색을 하고 있었고 한들 바람에도 휘청거릴만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아파도 되는, 암이 걸려도 되는 나이는 없지만 마음의 안쓰러움은 젊다는 것을 넘어 어린 환자들에게 더 커지지 마련이다. ‘저 휠체어에서 얼마나 일어나고 싶을까, 얼마나 달리고 싶을까, 아픈 아들을 봐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일면식 하나 없고 앞으로도 없을 가족이지만 등 한번 토닥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여든은 훌쩍 넘어 보이는 할머니를 보았다. 엄마와 같은 진료실이었던 할머니는 중년을 넘긴 듯한 세명의 남매가 모시고 온 듯했다. 할머니는 치매가 있으신지 돌아서면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하셨다. 화장실이 가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한 명의 딸은 가도 용무를 보지 않을 거라며 안 가도 된다고 하고, 아들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가 다녀오겠다며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어 본다. ‘할머니가 치매가 있나 보네. 저 연세에, 이렇게 뒤늦게 어디가 편찮으신 걸까?’ 풀지 못할 질문을 던져본다.


그곳을 오가는 수백 명의 사람 중에 어느 누구도 같은 사람은 없다. 살아온 시간, 환경, 몸 상태가 다르기에 저마다 각자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오진이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료실 앞에 있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완치의 소식을 듣고 진료실을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지겨운 치료를 언제까지 해야 하나 혹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다. 오늘은 백혈구 수치가 괜찮은지, 주사를 맞을 수 있을지, 암 수치는 더 오르지 않았는지 각자의 무게를 가지고 그 자리에 있다.


가급적이면 모두가 아프지 않고 사는 세상, 그런 이상의 세계를 꿈꾸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기 예수님이 오신 크리스마스를 앞뒀으니 그 핑계로 가만히 읊조려본다. 우리 앞에 있는 태풍의 소용돌이가 조금은 잠잠해지길, 잠시 이는 바람에 너무 휘청거리지 않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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