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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가정원 Oct 27. 2022

완벽 그 잡채

기억맛집

나의 엄마는 음식 솜씨가 참 좋으신 분이다. 가르쳐준 이가 없다는데 나의 외할머니와 친할머니가 음식을 하실 때 어깨 너머로 배워서 눈대중으로 대충 하신다는 고수 중의 고수이시다. 엄마가 해주시는 많은 요리들은 결혼 후에도 생각나는 것들이 많고, 그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잡채는 빠질 수 없는 으뜸 중에 으뜸이다.


잡채란 이름 그대로 잡다한 재료를(雜, 잡) 모아 볶은(燴, 회) 요리로, 원래는 기름을 좋아하는 광둥성 지방에서 잡채의 재료를 고르게 익힐 수 있도록 일정한 크기로 채 썰어낸 뒤 땅콩기름이나 돼지기름을 붓고 냄비에 볶아 내어 주는 것이 기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잡채'라는 이름과 다르게 '당면'이 주가 되는 음식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네이버 나무위키 참조>


그래서일까?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가 잡채를 해주시는 날에는 밥은 필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잡채만 국그릇에 한가득 담아주시면 천하를 얻은 듯, 한 그릇 뚝딱 비워내곤 했다.


탱글탱글 잘 삶아진 당면에 간장 양념이 베인 비계없는 돼지고기가 가장 맛있었던 엄마의 잡채지만, 여느 부모님처럼 야채를 함께 먹이고픈 엄마의 마음으로 인해 가늘게 채썬 주홍빛 당근을 시작으로 한국 요리에 빠지기 힘든, 볶으면 더 달콤한 맛이 나는 양파, 고기 식감을 내는 버섯, 푸른 빛을 담당하는 시금치나 부추 등으로 형형색색 눈으로도 맛을 내는 야채들이 늘 푸짐하게 곁들여졌다.  


여기에 더불어 항상 빠지지 않았던 잡채재료가 바로 어묵이였다. 어묵이 맛있기로 유명한 부산에서 살아서인지 싼 가격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빠지면 서운한 어묵은 지금 우리 집 아이들도  고기 다음으로 맛있게 먹는 재료이다.


국수가락처럼 길다란 당면을 한 젓가락 올려 불규칙적으로 딸려오는 고명들과 함께 크게 한 입에 우겨넣고 씹고 있으면 입안은 그야말로 다채로운 맛의 향연으로 즐겁고, 고소한 참기름 냄새로 절로 행복한 식사였다.


평소 먹는 식사량에 비교하면 두 배 정도 많은 잡채를 먹어치우던 나를 꼭 닮은 아이가 나의 첫사랑인 딸이다. 평소에도 먹성이 좋은 아이지만 전형적인 한식 밥상을 최고로 꼽는 아이는 밥과 국 몇가지 반찬이 어우러진 식사 시간을 행복으로 여기는데 유독 '잡채'만은 예외인 것을 보면 유전자가 이토록 신비로운 것이라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며칠 전, 치솟는 물가에 늘 비슷한 식재료로 밥상을 차려주다가 문득, 잡채를 먹은지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당면과 잡채용 돼지고기만 있어도 뚝딱 만들어 한 끼를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인데 왜 잊고 있었던 걸까?


곧장 마트로 달려가 당면과 고기, 그리고 냉장고에 없던 버섯을 사서 당면부터 따뜻한 물에 푹 담궈 불리기 시작했다. 이것만 해놓아도 이미 반은 끝났다. 당면을 불릴 동안 돼지고기를 간장과 후추 약간으로 양념에 재워 냉장고에 넣어두고선 냉장고 야채칸 서랍장을 열고 함께 볶을 야채를 선택하고 다듬어 채썰고, 하이라이트 어묵을 한가득 야채와 비슷한 크기로 썰어두면 완벽하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해두고 저녁 시간에 맞춰서 재료를 볶고 간장과 참기름 몇 방울 떨군 물에 당면을 삶아서 다시 기름 살짝 두른 팬에 한 번 휘리릭 볶은 후 큼지막한 스텐볼에 모두 넣어 오로지 간장과 참기름, 깨소금만으로 간을 맞춰 버무려주면 따끈하면서 쫄깃하고 다양한 야채들의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잡채귀신인 나와 딸은 역시나 한그릇 가득 잡채만을 먹으면서 연신 맛있다며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그릇을 비워냈고, 두 아이는 남은 잡채는 다음날 꼭 잡채짜장밥으로 달라고 이야기한다. 냉장고에 한 번 들어가면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잘 먹지 않는 아이들이지만 잡채만은 꼭 넉넉히 만들어 다시 먹게 해달라고 한다.


그래서 이튿날에는 아주 간편하게 아이들이 좋아하는 유니짜장을 데워 잡채만 마른 프라이팬에 덖은 후 한 끼 잘 해결할 수 있었던, 나의 소중한 음식 잡채는 동이 났다.

나에겐 아주 특별한 소울 푸드는 없다. 그러나 그동안 먹고 자란 음식들 하나 하나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기에 모두 소울 푸드라고 할 수 있다. 잡채 역시 엄마가 만드시는 동안 그 옆을 서성이며 간을 봐준다고 한 입씩, 너무 맛있다며 두 입씩 그렇게 엄마 곁에 서서 아기 참새가 모이를 받아 먹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엄마가 넣어 주던 그 기억이 너무 따뜻하다. 지금은 내 곁에서 나와 같은 모습으로 서성이는 나의 두 아이의 이야기까지 함께 하기에 더욱 소중하고 포근한 기억이 서린 음식이 되었다.

이젠 내가 우리 엄마 앞에서 맛있는 잡채를 만들면 곱게 나이든 우리 엄마가 아기 참새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요즘 기력이 부쩍 쇠해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잡채 한 다라이 만들어 드리고 올 날을 기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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