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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련 이다겸 Oct 10. 2021

발아, 고맙다

  나목들의 계절이다. 곱게 물들었던 단풍은 낙엽이 되었다. 겨울이 주는 삭막함과 상쾌함을 받아들이며 계절의 흐름에 순응하고 있다.     

  경북 문경에 있는 주흘산은 문경의 진산鎭山이다. 높이 1,106m 산으로 조령산, 포암산, 월악산 등과 더불어 소백산맥의 중심을 이룬다. 나라 기둥이 되는 큰 산으로 매년 조정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올리던 신령스러운 영산靈山으로 받들어 왔다. 주흘산은 ‘우두머리 의연한 산’이란 한자 뜻 그대로 문경새재의 주산이라고 불리며  역사적 전설까지 담고 있어 매력적인 산이다.

          

  산길은 완만한 경사지로 호젓하다. 여궁 폭포로 향하는 길은 질펀하다. 며칠 전 눈이 오더니 땅이 얼었다 녹는 현상이다. 바위 아래 비좁은 길에 손잡이 줄이 달려 있다. 아래는 아찔한 낭떠러지다. 위험해 보여 옷매무새를 다듬고 발끝에 힘을 주며 조심스레 줄을 잡고 걸음을 옮긴다. 우리의 삶도 눈앞에 놓인 위험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시행착오를 줄이는 삶을 살 수도 있을 텐데...     

  초입에서 800m를 올랐다. 여궁 폭포는 높이가 20m로 노송과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이름 그대로 여체의 신비로움을 담은 듯 바위 틈새 깊숙한 곳에서 폭포수가 흐르고 있다. 선녀가 목욕하고 올라갔다는 물은 옥빛을 발하고 있다. 일명 여심 폭포로 불린다.

  바스락 거리는 낙엽은 없다. 산에서 놀고 있는 몇 겹으로 쌓인 낙엽들은 축 늘어진 채 색깔만 자랑한다. 밟아도 감각이 무디어졌다. 이제는 부토腐土가 되어 땅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한다. 동네 뒷산을 걷는 느낌이다. 작은 돌멩이와 흙길이 지겨움을 주기도 하지만, 흙길은 맨발 걷기를 할 정도로 맑고 부드럽다.     

계단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계단을 오르면 정상이 있을까? 약 천 개의 계단은 오르기 쉽게 높이와 폭이 알맞아 계단이 주는 부담감은 없다. 한 칸, 두 칸 헤아리면서 다양한 발동작으로 올라 보았다. 발을 40도가량 옆으로 해서 오르니 편안한 계단 오르기가 되었다. 산 중턱에 ‘졸졸졸’ 흐르는 약수터가 있다. 플라스틱 작은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들이켜니 맺혔던 땀방울이 증발한다.     

  정상에 섰다. 푸른 잎 하나 없는 메마른 산을 본다. 눈 아래 펼쳐 보이는 골짜기마다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멀리서 보니 겨울을 맞은 동네는 대낮인데도 썰렁하고 을씨년스럽다. 스쳐 지나는 시간들에 대한 삶이 자연과 대비對備된다. 가을은 겨울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휴식을 하며 마지막 삶을 곱게 마무리하고 있다.      

  넓고 평평한 자리를 찾았다. 돗자리를 펴고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낸다. 잡곡밥, 야채샐러드. 김밥, 떡, 족발 등 다양한 음식을 사이좋게 나눠 먹는다. 

짧은 휴식을 취한다. 편안하게 누워서 하늘을 응시한다. 흘러가는 구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뭉게뭉게 날아간다.  

   

  제2 관문으로 하산한다. 산길은 돌과 흙이 얼어 있어 미끄럽다. 북쪽이라 햇살을 받을 수 없으니 당연하다. 거목들이 쓰러져 있다. 오랜 세월 땅을 지켜온 큰 아름드리나무들이 태풍 피해를 입어 뿌리째 뽑혀 길 위에 걸림돌로 누워 있다. 한 때는 위풍당당한 모습을 자랑하며 그늘을 만들어 주었을 텐데, 어떤 나무는 바위, 돌 틈새에 어렵게 뿌리를 내렸지만 자연의 위력을 견디지 못해서 넘어져 버렸다. 

  약 2시간 이상을 발끝에 힘을 주고 조심스레 내려왔다. 작은 돌멩이들이 많고 경사가 심한 길이라 미끄러지면 산 아래까지 굴러갈 것 같다. 얼마나 용을 쓰고 내려왔던지 무릎 관절이  아프다. 계곡을 건너는 중간쯤에서 신발과 양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고 옥빛 물에 발을 풍덩 빠뜨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앗 차가워‘ 하며 비명을 질렀다. 물이 차가워 1분도 머물러 있기 힘들다. 두 발을 믿고 어디든 다닌다. 신체 하중에서 온 몸을 지탱해 주는 고마운 발이다. 발의 피로를 풀어 주려고 차가움을 무릅쓰고 수척해 보이는 발을 정성껏 마사지를 해주었다.  ’‘발아, 고맙다.’ 

    

  문경새재 과거길(옛길)을 걸었다. 영남에서 한양을 다닐 수 있는 조령, 중령, 추풍령을 경유했던 길이다. 과거를 보기 위해 수많은 선비들이 넘나들었던 길이 아닌가. 주흘산을 넘어가면 영남으로 가는 길을 단축할 수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발자국을 찍었던 길이다. 선비들 발자국 위에 조심스럽게 나도 발 도장을 찍었다. 

소원 성취 탑도 있다. 옛날 문경새재를 지나는 길손들이 한 개의 돌을 쌓으며 산신령님께 빌었을 소원들이 저 돌탑에 숨어 있다. 소원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작은 돌멩이를 주워 돌탑 위에 올렸다. 

   짚신을 몇 켤레씩 등 봇짐에 매달고 걸어가는 도포를 입고 검은 갓을 쓴 선비들, 나달나달 낡은 갓을 쓴 태연한 모습. 근엄한 선비들이 앞뒤로 보이는 듯하다. 겸손과 바른 정견定見을 가지며 지혜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라고 흐르는 물과 주흘산을 넘었던 옛 선비들이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옥빛 물을 따라 걸었다. 집으로 돌아와 발의 보시를 온몸으로 확인한다. 발을 문지르며 비누 거품을 내어서 발가락 사이사이를 꼼꼼히 닦고 어루만져준다. 불평불만도 무관심으로 넘겨주는 발을 다시 찬물에 담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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