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조직이 느리다, 복지부동이다, 자기 일 아니라고 뺑뺑이 돌린다
아마 공무원, 공공기관에 대한 불만을 적어보라면 100% 나올 18번 레파토리입니다.
그런데 주민등록등본을 떼는데 있어서 느리고 뺑뺑이 돌리고 자기 일 아니라고 외면하는 공무원 보신 적 있나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공무원, 공공기관 등 공조직이 날이 갈수록 적극행정보다 소극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이유가 숨어있습니다.
저 자신이 오래 공조직쪽에 있다는 점은 감안하고 들어주시되, '공조직에서도 이런 애로사항이 있구나...'하는 점을 알아주신다면 공무원, 공공기관 직원들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질 것이고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까지 공감하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공조직에다 내가 요청한 업무처리가 늦어지는 근본원인은 재량, 완전한 신규업무, 중첩업무 셋 중 적어도 어느 하나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가. 재량
먼저 재량입니다.
간부들은 모르겠지만 공조직 실무자들은 재량있는 업무를 오히려 싫어합니다.
차라리 주민등록등본 발급처럼 명백한 기준에 따라 기계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명백한 지침이 있고 재량이 없는 업무는 안된다고 거절해서 민원으로 비화되더라도 직원 입장에서 부담이 없습니다.
상사는 물론 감사원 감사가 나오더라도 내부규정과 그에 따른 업무처리 내역만 제시하면 문책당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직원 개인의 판단으로 신청자에게 이익/불이익을 줄 수 있는 재량의 영역은 많은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고려한다는 것은 해당 업무처리가 혹시 이어서 설명할 정보공유로 인한 선례타령, 민원, 고소, 정보공개청구 등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업무적으로만 고민하면 되는데, 그동안의 공조직 생활경험 상 민원 등의 리스크도 함께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상대적으로 재량있는 업무는 처리속도가 좀 더 느려지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나. 새로운 업무/중첩된 업무
다음으로 완전히 새로운 업무이거나 여러 부서의 업무가 겹쳐져 있는 경우입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급속히 즐기는 취미가 된 드론을 가정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드론을 아파트 단지에서 날려서 이웃집을 촬영하고 도로에도 날려서 주행중이던 여러 차주들에게서 신고가 들어왔다면 이건 누가 담당해야 합니까?
도촬시도로 보고 여성청소년과가 담당해야 할까요? 아니면 도로교통 방해로 보고 교통과에서 담당해야 할까요?
대단지 아파트를 건축한다고 하면 당연히 여러 부처, 여러 부서의 업무가 겹칠 수밖에 없습니다.
도로도 새로 정비해야 할 것이고 학교를 단지 내에 지어야 할수도 있고 상하수도 시설도 만들어야 할 것이며 기부채납받아 공원을 지을수도 있고 지하철역과 연결될 수도 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업무는 각각 소관부처, 소관부서가 있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업무가 소위 핫한 아이템이건 기피 아이템이건 처리가 늦어지는 결과는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VIP 또는 여론의 관심의 집중된 핫한 건수는 서로 하려고 결정이 늦어지고, 해봐야 태도 안나고 칭찬도 못 받는데 일만 많은 기피업무는 서로 떠넘기느라 결정이 늦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만 쓰고 끝내면 마치 공조직에 있는 직원들이 아주 몹쓸 사람들이고 일하기 싫고 뺀질대면서 놀기만 하려는 사람처럼 느껴지실지 모르겠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저 자신이 그에 속한 한 명으로서 이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구조적 문제, 수요자 측면에서의 핵심적인 원인을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가. 정보공유로 인한 선례타령
아마 공조직에서 일한 사람 중 이것을 한 번도 안 경험한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매뉴얼대로 거절해도 되지만 워낙 사정이 딱해서 매뉴얼을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처리해줬는데, 그 분이 이 사실을 여기저기 알리거나 인터넷 카페 같은 곳에 올려서 그 이후로 "그 사람은 그렇게 해주고 왜 나는 안해주냐?"고 민원이 걸리는 경험
최근 집요한 민원으로 인한 공무원 자살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더 이상 강성민원, 집단민원의 폐혜를 가볍게 보는 분들은 없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일을 한, 두 번 겪고 나면 담당자도 사람인지라 아무래도 매뉴얼을 보수적이고 소극적으로 해석하고 운영하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나. 무한민원
현재 우리나라에는 실질적으로 공직자를 악성 민원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지 못합니다.
민원처리에 관한 법률이 있지만 이 법 제9조제1항에 따라 공직자는 민원을 거부할 수 없고, 이 법률에 의해 정작 보호되는 부분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못합니다.
더 문제는 민원이 제기되었을 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명백히 규정대로 처리해서 더 어떻게 할 건수가 없으면 모르겠지만, 담당자가 재량에 따라 업무를 처리한 경우, 비슷하 사례에서 누구는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해주고 누구는 안해준 경우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뻔히 하급자에게 악성민원이 들어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상당수 상사들이나 기관장은 여기에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습니다.
민원인에게 무조건 잘못했다고 사과하라고 종용하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법률도, 제도도, 직장에서도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느끼게 되면 공직자는 사명감보다 본인의 생명, 가족을 우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어느 사회, 어느 조직이나 그렇듯 말씀드린 구조적 문제가 아닌 순전히 개인의 성향, 게으름, 업무회피로 인해 느리고 뺑뺑이 돌리고 복지부동하는 공무원, 공공기관 직원이 전혀 없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어느 곳이나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직 차원에서 한 번 열심히 해보려는 사람을 보호하고 응원하고 자존감을 북돋아주고 자질과 능력이 부족한 직원은 버티기 힘든 환경과 분위기를 만드는 것인데, 그런 노력이 공조직 내는 물론 우리 사회에서도 미진하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 행정서비스의 질과 속도는 세계 어느 곳과 견주어도 뒤쳐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이건 정말 외국에 여행을 하거나 살아보신 분들이라면 많이 공감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최근 공무원의 퇴사가 줄을 잇고 있으며 공공기관은 취준생들에게 인기가 날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면 결국 그 대가는 우리 모두에게 돌아오게 되지 않을까?
저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