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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하 Jan 20. 2020

현실은 늘 상상했던 최악보단 낫다

 월차를 일주일이나 쓰고 여행을 다녀왔다. 오랜만의 출근을 앞둔 밤, 시차 적응을 못해서 뒤척이는데 J가 뒤에서 껴안으며 말했다.

 "수고했어. 우리 이번 여행도 무사히 잘 다녀왔네."

 그 말에 너도 수고 많았어.라고 답하려다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마치 '당신의 꿈결 같은 시간은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다음 이 시간까지 안녕히.'하고 선포하는 것 같아서. 악몽 같은 시간의 시작을 알려주는 것 같아서.


 지난 일주일간 미국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절벽에 에워싸인 채로 햇살은 따듯하고 바람은 보송보송하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냇물이 있는 숲 속에서 지냈다. 핸드폰도 터지지 않고 차 소리도 들리지 않고 벌레도 없고 할 일도, 괴롭히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지냈다. 나는 그 평온 속에서 간절하게 심심함을 기다렸다. 대체 심심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었다. 늘 하고 싶은 것은 터질 듯이 쌓여있었다. 그런데 해야 할 것부터 하느라 대기줄이 점점 불어나기만 하고 있었다. 이렇게 살다가 내가 죽으면 저 터질듯한 주머니는 팡하고 정말로 터져버려서 내 무덤이 되지 않을까. 비석에 '강수하,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절반도 하지 못하고 떠나다.'라고 적히는 거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나 고대했던 심심함이 함께 데려온 것은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요세미티 국립공원 한가운데서 며칠 동안이나 잠 못 이루며 회사 걱정을 했다. 꼬박 3일을 들여 도착한 곳에서 그따위 생각이나 했다. 나의 회사생활은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영영 이 회사에서는 가망이 없는 걸까. 없겠지, 회사가 가망이 없는데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가망을 찾겠어. 나는 언제까지 이런 의미 없는 생활을 해야 할까. 따위 생각이나 했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20분 전에 걸려온 전화에는 별것도 아닌 이슈가 있었는데 팀장이 노발대발 화를 냈었다. 정시에는 공항으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해두었는데 나를 옆에 세워두고 거래처와 통화를 십오 분을 더 했다. 큰일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니고 인수인계도 더 경력 많으신 분께 하고 왔으니 문제 될 게 없는데 자꾸 생각났다. 일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팀장이 나를 향해 차곡차곡 적립하고 있을 지랄이 계속 생각났다. 내가 월차를 일주일이나 쓴 게 고까워서 일부러 괴롭힌 것이 빤히 보여 분했다. 내 월차를 써서 만든 휴가를 이딴 생각들로 소진해버렸으니 회사로부터 위자료라도 받아야 되는 거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아무리 절망이 깊어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휴가는 결국 끝이 났다. 나는 적어도 당분간은 이런 일상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의 주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생각부터 바꾸어 보기로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서 8 to 5로 근무한 뒤에 퇴근하여 돌아오면 저녁 6시가 넘는다. 하루에 12시간도 넘는 시간을 회사에 빼앗겼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받는 임금이 과연 12시간의 가치가 되는지 요리조리 따져보았었다. 그 턱도 없는 푼돈에 먹고 사느라 하는 수 없이 삶을 홀랑 팔아먹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사실 8시간만 일한다. 그리고 그마저도 짬짬이 딴짓을 할 수 있다. 그러니 12시간을 지레 먼저 포기해버리는 건 틀린 생각이다.


 우선 아침 6시부터 8시까지의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로 했다. 일어나서 상쾌한 마음으로 씻고, 머리를 대충 말리고, 창가에 대자로 누워 5분간 명상을 한다. 출근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팡팡 떠오르지만 애써 몰아내고 아침 8시까지 어떤 재미난 생각으로 채워볼까 고민한다. 그리고 5분간 수첩에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쓴다. 마치 출근하지 않을 것처럼, 영영 자유인인 것처럼 쓴다. 그리고선 옷을 챙겨 입고 수첩을 들고나가 지하철에 앉아 50분 동안 즐거운 생각만 한다. 즐거운 계획만 짠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쓴다. 그러면 아침 두 시간은 회사를 위한 시간이 아닌 내 것이다. 더 이상 내가 시간을 팔아 빌어먹고 사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출근하자마자 들어간 팀 회의에서 팀장은 다행히 나를 그렇게 들볶진 않았다. 다른 이슈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는 모양이었다. 회의실에서 오전 내내 그 이슈에 대한 넋두리를 들어가며 수백 통의 메일을 분류하고 났더니 회신은 못했어도 어느 정도 업무가 파악이 되어 초조했던 마음이 진정됐다. 사실 일상이 지옥이라기엔 진짜 지옥 같은 사건은 아주 가끔씩만 벌어지며 늘 거기에 마음 쓸 필요 없다. 언제나 최악을 미리 떠올리는 것은 나의 고질병이고 현실은 늘 상상했던 그것보다 조금은 낫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거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 그랬다. 그러니 나는 이제 변해야 한다. 혼자 앞서서 최악을 시뮬레이션해보는 습관은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긴 했지만 나를 많이 소진시켰다. 나는 일어나지 않을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야 한다. 생각보단 조금 나은 나의 현재를 바라봐야 한다.


 퇴근하고 나서 왠지 둘 다 몸이 안 좋아서 죽을 사 먹었다. 요세미티에서 먹은 뜨끈한 수프도 맛있었지만 오랜만에 먹는 죽도 꽤나 괜찮았다. 시차 때문에 쏟아지는 졸음 속에서도 그 졸음에 더 취하고 싶어서 감기약을 한 알씩 나눠먹고 일찍 누웠다. 내 써머레스트 매트와 오리털 침낭도 포근했지만 우리 집의 매트리스와 이불도 꽤나 괜찮았다. 그렇게 좋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나쁘지도 않은 하루였다. 기뻐할 것도 없지만 절망할 것도 없는 하루였다.






<아주 독립적인 여자 강수하>

 - 냉정한 분노로 나를 지키는 이야기


“강수하는 강한 사람도 아닌 주제에, 

너무나 꿋꿋하다.

강수하가 너무 독립적이지 않아도 되도록, 

함께 옆에 서서 가고 싶다.”

- 서늘한여름밤(《나에게 다정한 하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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