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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현 Jul 19. 2024

엄마 초상화 그리기

제목 : 사랑하는 똑 단발 방여사

두 달 전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화실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이제 8주 과정을 다 끝내고, 화실은 더 이상 다니지 않지만 매일 하나씩 그림을 그리며 평생 취미로 가져갈 생각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강아지들을 그렸고  읽은 책을 기념하기 위해 표지 그림을 그렸고  딸 얼굴도 그렸다.


아직 실력이 비천하고 미미한지라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수준은 못된다.

그래서 내 그림의 단골 대상은 주로 '강아지'들이다. 녀석들을 그리다 보면 행복감이 몽글몽글 올라오고, 무엇보다 완성된 그림을 보여줘도 마음에 안 든다며 타박을 들을 일도 없기 때문에 부담 없이 그릴 수 있다.


중학교 때 이후로 수채용 붓을 잡은 것은 정말 처음이지 싶다. 선생님은 미술 수업시간 내에 완성하지 못한 그림은 꼭 과제로 내주셨는데 집에서 그림을 그릴 때면 색감이 없어서인지 한 번의 붓질로 전체 그림이 산으로 가기 일쑤여서 나는 정말 그림에 영 소질이 없다는 확증편향적 사고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다 브런치에 쓴 다른 작가님들 글 배경으로 사진이 아닌 드로잉 수채화가 등장하는 걸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수채화가 주는 따뜻한 느낌이 좋았고 또 글과 그림이 안성맞춤으로 어우러지는 게 글 읽는 재미가 배가 되었다.


그렇게 마냥 부러워만 하다 이심전심으로 통했는지 직장 동료가 취미반 그림 class가 있다면서  브런치에 그림도 넣으면 좋을 것 같다며 화실을 추천해 주었다. 전문가에게 배우면 똥손도 구제가 되려나 하는 일말의 희망으로 그렇게 드로 수채화를 배우게 되었다.


사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이유는 바로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예체능에 골고루 능했는데 손재주도 좋아 미용일을 업으로 삼았고 우리 운동화날이면 엄마들 대항 달리기도 잘했고 노래는 말할 것도 없이 잘했고 거기다 그림까지 멋지게 그렸다.


어릴 적 우리 집 담벼락은 엄마의 화폭이었다.

엄마는 물감이 아닌 빨간색 페인트로 다양한 꽃을 멋들어지게 그렸다.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고 신박한 발상이었다. 과감하게 페인트로 그림을 그려넣다니ᆢ 만약 엄마가 부잣집 귀한 딸로 태어나 지원을 받았다면 시대의 획을 그을 예술가로 대성했을지 모른다. 이런 엄마의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타고 난 다재다능함을 꽃피울 시도조차 못하고 살아온 엄마의 고된 삶이 너무 안타깝다.


수년 전에 시골에서 무료하게 혼자 생활하는 엄마에게 그림 용품을 사서 보낸 적이 있었다.

엄마의 그림 실력을 썩히는 것이 아쉽기도 했고 또래 친구들이 없었던 적적한 시골생활에 취미생활이라도 하며 건강하게 시간을 보내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다 늙어서 무슨 그림이냐며 미술 물품들을 한편에 치워두었다.


엄마를 보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소중한 꿈을 하나씩 내려놓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엄마는 미술 대회에 간절히 나가고 싶었던 소녀였고, 팍팍한 삶의 현실에도 집 담벼락을 화폭 삼아 과감하게 예쁜 꽃을 그렸던 낭만가였는데 말이다.


어쩌면 엄마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용품을 사서 택배로 보낸 것부터가 잘못일 테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내 로망을 엄마가 먼저 실현시켜 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또 민요를 부르고 술친구들 속에 섞여 무의미한 수다로 시간을 보내는 엄마보다 고상하게 그림을 그리는 엄마의 모습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달리 나는 꿈꾸기를 좋아한다.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잘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다. 꿈을 꾸는 것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늙었다는 이유로 좋아했던 일을 시도조차 안 하는 엄마가 안타깝다.


엄마의 유전자 중 손재주나 미술 실력은 닮았으면 좋겠다. 내 유전자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면 이제라도 발현되었으면 한다.


어제는 처음으로 휴대폰 사진함에 있던 엄마 얼굴을 그렸다. 그런데 정말이지 사람얼굴 그리는 게 강아지 얼굴 그리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엄마. 다음번에는 실력 더 키워서 예쁘게 그려드릴게요.

내 안에 엄마 유전자가 자꾸 그림 배우라고, 그림 그리라고 시키나 봐요ㅎㅎ


엄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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