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필요해
난 꽤 부지런한 편이다.
주말임에도 새벽 5시면 자동으로 눈이 번쩍 떠진다.
어린 시절부터 아침형 인간인걸 보면 유전자 속 생체리듬 자체가 아침형 인간으로 기본 세팅되어 태어난 것 같다. 물론 나이가 들어 아침잠이 줄어서일 수도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새벽녘에 기상해 버릇했으니 꼭 나이 때문은 아닐 거라고 합리화하고 있다.
이런 나와 반대로 딸은 올빼미형이다.
방학에도 서로 눈뜨고 있는 시간이 다르니 한집에 살아도 얼굴 보기 힘들다. 새벽부터 부산스레 움직이느라 초저녁만 되면 슬슬 눈이 감기는 나와 달리 딸은 오후 늦게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내가 잠자리에 들 때쯤 상쾌한 하루의 시작을 위한 샤워를 한다. 어젯밤에도 잠자리에 들었다가 화장실에서 새어 나오는 시원한 물소리에 깨어 잠을 설쳤다.
딸의 샤워시간은 최소 30분 이상이다.
중학생 때는 긴 시간을 샤워에 할애하느라 지각이 잦았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지각 벌점 문자가 날아올 때마다 화가 났지만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고쳐지지 않아 결국에는 잔소리도 관두었다. 고로 우리 집 관리비 내역 중 최고는 '온수 요금'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화장실이 두 개인 집에 살았을 때는 큰 문제가 안 됐지만 화장실이 하나인 지금, 오랜 시간 화장실을 독점하는 딸 때문에 종종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최근에는 화장실을 1시간 이상 쓰는 바람에 산책을 마친 새롬이 발을 바로 씻길 수 없어 난감했고, 또 어느 날은 화장실에서 딸이 나오기만 기다리다 참다못한 나머지 집 근처 공원 공중화장실로 달려갔다. 또 딸이 하루 사용하는 수건의 개수는 최소 3개 이상이다. 발 닦는 수건. 머리 말리는 수건, 몸 닦는 수건을 각각 따로 사용한다.
이런 딸의 습관을 고치려 잔소리도 해보고, 읍소도 해보고, 논리적으로 설득도 해보고, 화도 내보았지만 그럴수록 화장실 사용 시간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그러다 잔소리를 완전히 멈추게 된 계기가 있다.
어느 날 딸과 무심코 대화를 나누던 중 스트레스 푸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딸은 샤워부스에서 나오는 세찬 물줄기를 맞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딸의 지난 행동에 대한 모든 의문이 단박에 풀렸다. 집을 이사하고 한동안 화장실 수압이 약하다고 불평하는 딸 때문에(내 기준에는 수압 정상이었음) 관리실에 전화하고, 샤워기 헤드를 교체하는 등 진땀을 빼게 했던 일, 딸에게 화장실 사용 시간에 대해 닦달하면 할수록 더 오래 화장실에 머물렀던 일 등.
이 모든 행동이 엄마를 골탕 먹이기 위한 행동이 아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화장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다.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어렵고, 또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말 안 해도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하는 헛된 기대는 과감히 접자. 오직 대화만이 오해에서 이해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준다. 어쩌면 우리는 가까운 가족일수록 더 많이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의 대화가 없었다면 난 아직도 딸의 의도를 오해하고 문득문득 치솟는 화를 다스리려 몸 안에 사리를 양산하고 있었을 테다.
그래. 우리 딸
너 말대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험한 세상 살아내느라 고생이 많다.
온수요금, 수건 빨래는 엄마가 모두 감당할 테니 스트레스 마음껏 풀어라. 다만, 엄마가 급할 때는 중간에 멈추고 화장실 문을 잠시 열어주는 아량을 베풀어 준다면 고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