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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현 Apr 11. 2024

반려견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겠다는 결심

견생의 전 과정을 함께하기

사랑은 결심이다.


내가 반려견을 키우며 결심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매일 산책시키기

둘째, 내 아가들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기

셋째, 절대 안락사로 떠나보내지 않기


나는 씩씩이에게 했던 약속 3가지를 모두 지켰다.


이제와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세 가지 결심 중 가장 지키기 힘들었던 약속은 세 번째 '안락사로 떠나보내지 않기'였다.  블로그에 '반려견 안락사로 고민하는 분들에게'라는 글을 쓴 이유도 사실은 흔들리고 있던 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쓴 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8개월간의 투병기간 동안 나는 정말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기저귀를 상시 착용하기 전에는 잦은 소변 실수로 하루 세 번 이불빨래는 기본이었다. 그러다 암덩어리가 점점 세력을 확장해 씩씩이의 방광을 잠식해 버렸고 그렇게 소변 저장 능력을 상실한 후부터는 기저귀를 착용해야 했다.


그럼에도 소변 길은 막히지 않아 소변이  흘러나와 주는 것 만도 감사한 일이어서 기저귀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기저귀를 3-4시간마다 갈아줘야 했기 때문에 자유롭던 외출도 제한이 생겼고 밤에도 수시로 깨어 기저귀를 봐줘야 해 숙면은 절대 금물이 되어 버렸다.


또 식욕을 상실해 사료를 일절 먹지 않았던 터라 애타는 마음으로 하루종일 매달려  많은 종류의 간식을 돌아가며 입에 가져다주었다. 결국 씩씩이의 입은 굳게 닫혀버렸고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처치였던 진통제도 먹일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6.5킬로 작은 몸에 주사부위릍 찾아 돌아가며 피하주사나 근육주사로 진통제를 놔주었다. 주사를 매일 거듭할수록 주사부위  피부에 결절이 생겨 주사 놓을 자리를 찾기도 힘들었다.


아침마다 아픈 주사를 맞아야 했던 씩씩이.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그러다 간식도 일절 끊게 되면서 떠나기 마지막 20여 일은 강제급여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나의 힘듦은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간병 기간이 길어져 힘들다고 안락사로 떠나보내는 선택을 한다면 평생의 한으로 후회 속에 자책하며 보낼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나로 인해서는 안락사를 고민하지 않았다.


순간이었지만 안락사를 고민했던 이유는 씩씩이가 통증으로 괴로워할 때였다. 나의 결심이 아이게게 너무 큰 고통을 감내하도록 강요하는 건 아닌가 하는  자문에 씩씩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특히 떠나기 20여 일 전 강제급여를 시작한 이후부터는 더더욱 아이의 고통을 지켜보는 게 괴로웠다. 주변에서도 아이의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줄여주는 게 최선이라며 안락사를 권유했다.


아마 반려견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는 분이 계시다면 나와 같은 번뇌의 과정을 똑같이 겪으시리라 본다.


나는 간호사로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직업을 가졌고 그럼에도 소중한 내 아가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과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자식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과연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는가.. 오죽하면 그 과정이 생지옥이었다는 표현을 쓰겠는가....


결론적으로, 아이를 자연사로 떠나보낸 지금, 안락사의 유혹을 이겨낸 스스로에게 정말 잘 견뎌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마지막 순간까지 씩씩이 곁을 지키며 '후회'라는 뼈아픈 슬픔을 골수에 새기지 않기 위해 끝까지 웃는 얼굴로 녀석을 대했다. 내가 힘든 표정을 지으면 씩씩이가 혹여 미안해하거나 아픈 자신이 가족에게 짐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기우로 슬픔을 감추고 일부러라도 웃어주려 노력했다.   


한 생명의 마지막!

죽음의 과정까지 마침표를 찍은 지금...

나 역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한 기분이다.


존중받아 마땅한 생명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며 사랑과 희망의 등대가 되어주는 일은 세상의 가치로는 매길 수 없는 매우 고귀한 일이다.


또 씩씩이의 죽음을 지켜보며,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씩씩이의 마지막 동행자가 되어 주었듯 나의 마지막 순간에도 사랑과 인내로써 나를 배웅해 줄 동행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동행자가 되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동행자로서의 임무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공통의 과제이자 신이 열어놓은 축복의 통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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