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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 하루 Jun 12. 2020

일본 도서관에서 빌린 한국 책

일본 서점에서 한국 번역책을 자주 접하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 책이 읽고 싶어졌다. 


번역책은 서점에서 구할 수 있지만 문제는 원서. 물론 요즘은 전자책으로 읽을 수 있지만 역시 종이를 넘기면서 읽는 맛은 또 남다르다. 당분간 한국에 가기도 힘들고 예전에 교보문고 해외배송을 이용했다가 낭패본 적이 있어서 종이책 읽는 건 맘을 접었었다. 그런데 요 근래 한국 문학에 대한 높아진 관심에 혹시 몰라서 시립도서관에 검색해봤다. 큰 기대 안 했는데 원서가 있었다! 많진 않았지만 최근 서점 대상에서 번역 부문 1위를 차지한 <아몬드>와 일본 내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 지핀 <82년생 김지영>, 그 외에도 <현남오빠에게>, <2014년 이상문학상작품집>,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있었다. 심지어 몇 권은 대여 중이었다. 지금까지도 시립도서관에 한국어 책이 전혀 없는 건 아니였지만 대부분 한국의 역사, 문화 관련 전문 서적이거나 일본 소설의 한국어 번역본이었다. 비교적 최근에 발간된 원서들이 소장된 걸 보고 일본 내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일본에서 한국 문학이 관심받기 시작한 건 단연 <82년생 김지영>이다. 김지영을 읽었다는 일본 친구한테 어떻게 읽게 됐냐고 물어보니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기도 했고 표지가 너무 강렬해서 호기심이 생겼다고 했었다. (강렬하긴 강렬하다)

일본어 번역판

일본에서도 잔잔하게(?) 불던 미투 운동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맞물리면서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운 한국 소설들이 주목을 받았다. 미투 운동을 '잔잔하다'라고 표현한 건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만큼 일본에서 미투 운동이 사회 전반적으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명 저널리스트의 성폭행을 고발한 여성 저널리스트가 되려 매도되고 악플에 시달리는 등 일본 사회에서 미투 운동은 여성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줬다. 


한국 페미니즘 소설에 대한 일본 여성들의 관심은 어쩌면 필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서 실제 살면서 느낀 놀라움이나 의외성은 많지만 그중 하나가 일본 사회가 생각보다 여성에게 친절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여느 나라나 여성에게 친절한 사회가 있을까 싶다마는. 일본에 막 왔을 당시에는 그래도 일본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앞서간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당연히 남녀평등, 여성차별과 같은 인식에 밝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일했던 몇몇의 조직에선 여성 관리직은 매우 극소수였고 반면 계약직 직원의 대다수가 여성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젊은 여직원들이 남자 상사 옆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것에 누구도 불편함을 표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서도 비슷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육아와 집안일은 온전히 여성의 몫이고 주변엔 경단녀들이 수두룩하다(최근, 일본 맞벌이 부부의 1일 육아 및 가사 분담 시간은 여성이 7시간인데 비해 남성은 1시간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느낀 불편함은 이에 대해 여자든 남자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난 여성이 짊어지는 부담에 대해 여기 사람들은 부당하다고 '못' 느끼는 줄만 알았다. 이 또한 문화의 차이인가 싶었다. 


그런데 최근 전국의 플라워 데모(2019년 3월 성폭력 사건에 대한 연이은 무죄 판결에 반발하고자 시작된 성폭력 근절 집회)와 한국 페미니즘 소설에 대한 관심을 지켜보면서 이 사회가 여성이 겪는 차별, 부당함을 모른 게 아니었구나, 알고는 있지만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내길 꺼려 했던 것뿐이구나를 느꼈다. 정확히는 여성차별의 부당함에 대해 목소리를 내도 된다는 안심 내지는 안도감을 이 사회가 방관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그런 사회 통념을 불편하게 느껴왔던 사람들에겐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운 한국 소설이 크게 와닿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지금은 다양한 주제의 책들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엔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에세이가 인기를 얻고 있고, 성장 소설 <아몬드>는 서점 대상 번역 부분 1위를 차지했다. 공통적으로 감정의 자기 치유나 타인과의 관계 맺기 등과 같이 현대인들의 고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다. 그만큼 일본의 젊은 세대들도 각박한 사회 현실 앞에서 무기력과 우울감을 느낀다는 게 아닐까. 

삿포로시도서관에서 빌린 한국 원서

국적을 떠나 책을 통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가 느끼는 감정에 공감하고 그것을 공유한다는 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나라 대 나라로 맺어왔던 관계를 사람 대 사람으로 확장해갈 수 있는 작은 씨앗이 되어 주지 않을까. 앞으로 또 어떤 한국 원서를 도서관에서 만날 수 있게 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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