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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파크 Nov 14. 2022

[독서]희랍어시간_한강

우리가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그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사진 출처: 교보문고

제목: 희랍어시간

저자: 한강

출판사: 문학동네



  

  고통으로 가득찬 삶을 향해 담담히 나아가는 인간의 의지를 그리는 작가 한강의 장편소설 <<희랍어시간>>을 읽었다. 나는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작가의 문장이 시공간을 휘감아 나를 세상과 분리시킨 채 다른 공간으로 데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공간 속에서 나는 문장과 단어가 주는 미묘한 감각들에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 작가의 감각적인 문장을 읽을 때마다 때론 전율하곤 한다. <<희랍어시간>>은 특히나 다른 작품들보다 감각적인 문장들이 많았다. 소설 주인공이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목소리를 잃어버린 여자이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여인 (출처:pexels_yaroslav shuraev)



 그것에는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었다.


 소설 속 여주인공은 출판사 편집자, 문학 강연가로 활동하던 인물인데 어느 시점부터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문제는 '그것에는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를 상담한 정신과 의사는 그녀가 반년 전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수년 전 이혼을 했고, 소송전 끝에 아들의 양육권을 잃는 등 그녀가 최근 겪은 여러 사건들에서 얻은 일종의 정신적 충격으로 그녀의 '실어증'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그녀는 정신과의사에게 이렇게 답한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라고. 그녀의 실어증은 논리적 인과관계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지속적으로 힘든 사건들을 겪으며 삶이 추락해가기는 했으나 그것이 실어증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에게 실어증이란 원인을 알 수 없는, 설명할 수조차 없는, '그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었다.  



육체를 잃은 그림자처럼, 죽은 나무의 텅빈 속처럼, 운석과 운석 사이의 어두운 공간처럼 차고 희박한 침묵이다.


 그녀에게 열일곱살 때 한번, 그리고 이십년 뒤 또 한번 실어증이 찾아왔는데, 처음의 침묵은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깝다고 느끼는 반면, 지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고 느낀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에서 그녀는 마치 그림자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일전에 낯선 프랑스어를 접하며 말을 회복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말을 회복하기 위해 희랍어 강의를 신청하게 된다.





빛을 잃은 남자 (출처: pexels_jairo chacon)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었을까요.


  남자는 한국에서 살다가 독일로 건너가 희랍어 철학을 전공하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 강의를 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시각을 점차 잃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이는 몹시 시력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의 영향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여동생에게는 이러한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시력을 잃어가는 일도 명확한 인과로 설명될 수는 없는 일이다.

 독일에서 그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고, 그녀와 평생을 함께하고자 했지만 둘의 관계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에 닿고는 그대로 갈라진다. 남자는 시력을 거의 잃은 채, 사랑하던 그녀와 결별하고 애정하던 모든 것들을 독일에 둔 채,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 강의를 시작한다. 



하지만 말이야. 만일 소멸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말이야...... 그건 깨끗하고 선하고 숭고한 소멸 아닐까? 그러니까, 소멸하는 진눈깨비의 이데아는 깨끗하게, 아름답게, 완전하게,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진눈깨비 아닐까?


  빛을 잃어가는 삶을 사는 남자에게 미래란 소멸이고 죽음이다. 남자는 삶을 살면서 동시에 죽음을 살아간다. 독일에서 사랑하던 여인과 이데아에 대한 논쟁을 하면서 그는 '소멸의 이데아'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자는 이데아란 좋은 것, 최상의 덕이기 때문에 소멸과 죽음 따위에게 이데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하지만 남자는 위와 같이 반문한다. 

 남자는 자신의 삶을 진눈깨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깨끗하게, 아름답게, 숭고하게 소멸해가는. 이것이 남자가 자신에게 밀려들어온 실명(失明)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이다.

 각자 다른 삶의 궤적 속에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은 이제 희랍어 강의를 통해 서로의 궤적이 잠시 맞닿는 지점으로 향하게 된다.






말하지 못하는 여자가 손가락을 통해 처음으로 남자에게 발화한다. 



그녀는 다치지 않은 그의 왼손을 끌어다 잡는다. 숨을 들이쉬고, 떨리는 검지손가락 끝으로 그의 손바닥에 또박또박 쓴다.

먼저, 병원으로, 가요.


  희랍어시간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된 남자와 여자. 우연히 컴컴한 건물에 잘못 들어온 새를 구해주려다 여자와 남자가 어둠 속 계단에서 밀접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 남자는 어둠 속에서 새를 구하려다 그만 계단을 구르며 안경을 깨뜨리고, 유리 파편으로 인해 손을 다친다. 

 어둠 속에서 계단을 기던 남자에게 여자가 다가가고 다친 남자를 부축하여 그를 일으킨다. 말할 수 없는 여자는 볼 수 없는 남자에게 말하기 위해 손바닥에 한 획, 한 획을 또박또박 글자를 손가락으로 써내려간다. 

 우리 몸 중에서 가장 약한 피부를 가진 곳 중 하나인 손바닥을 통해 둘은 처음으로 소통한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세상에 서로를 초대한다. 

 



여자는 남자의 방에 들어간다.(출처: pexels_lalesh aldarwish)



....미안해요.
이렇게 혼자 오래 말해본 건 처음입니다.


 여자는 다친 남자를 병원에 데려가고, 집까지 동행한다. 남자의 집은 어둡다. 남자는 천장의 형광등 대신 식탁 위의 백열등을 켜달라고 부탁한다. 너무 밝으면 오히려 잘 보기 어려운 탓이다. 남자는 침대에 앉고, 여자는 창문 아래 있는 긴 목제 의자에 앉는다. 

 남자는 침묵밖에 들려줄 수 없는 여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처음으로 눈이 나빠질 것을 알게 된 순간, 독일로 온가족이 떠난 순간, 이방인으로서 받은 얼음처럼 선득한 혐오와 멸시의 시선들, 여행 중 죽은 자들의 뼛가루가 섞인 땅 위에서 느꼈던 공포, 사랑했던 여인에게 머리를 가격당해 사흘 동안 기절해 있던 일...

 남자는 계속해서 되묻는다. 


......듣고 있나요?

......내 말, 거기서 듣고 있나요?


 여자는 침묵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희랍어는 왜 배우는 건가요?

......그날, 희랍어로 공책에 쓴 건 뭐였나요?


어둠과 빛이 선득하게 섞여 있는 공간에서, 남자는 아무 것도 답하지 못하는 여자에게 질문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아직 완전히 멀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얼굴 윤곽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확인한다. 


여기 대답을 써주시겠어요?

지금, 택시를 부르시겠어요?



아니요.

첫 버스를

타고 갈게요.

 가늘게 떨리는 획과 점들이 두 사람의 살갗을 동시에 그었다가 사라진다. 소리가 없고 보이지 않는다. 입술도 눈도 없다. 떨림도, 따뜻함도 곧 사라진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렇게 여자는 남자의 집에서 새벽을 보낸다. 남자가 눈을 떴을 때 여자는 자리에 없다. 새벽 어느쯤엔가 방을 나선 것이 확실하다. 본인의 이불을 가지런히 개놓고 사라졌다.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남자의 손바닥에 안경점에 다녀오겠다고, 처방전을 가지고 있냐고, 비가 오니까 혼자 다녀오겠다고 적는다.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는다. 



그녀의 눈에 그의 눈이 비쳐 있고, 그 비친 눈에 그녀의 눈이, 그 눈에 다시 그의 눈이......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이미 핏발이 맺힌 그녀의 입술이 굳게 악물려 있는 것을 모른다. 



 여자는 두렵다. 틀려서는 안 되는 무게를 재는 것 같다고 느낀다. 틀려버리고 말 것 같다고 느낀다. 그것이 정말로 두렵다고 느낀다. 둘은 입을 맞춘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여자의 손이 남자의 얼굴을 흐르는 상처, 눈꺼풀, 뺨을 쓸어내린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고 두 뺨을 어루만진다. 여자는 두렵다. 혀끝보다, 목청보다 깊은 곳에서 소리를 내뱉는 것이. 그렇지만 여자는 용기를 낸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여자의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빛과 같은 음성이 희미하게 울려 퍼진다. 




당신은 내 얼굴을 껴안으며 작은 소리를 냈지요.
처음으로, 거품처럼 가냘프게. 둥글게.


여자는 거품처럼 가냘픈, 둥근 목소리를 낸다.


숲, 숲이라고.


그렇게 도저히 원인을 알 수 없던 여자의 실어증이, 가슴 깊숙한 곳을 꽉 막고 있던 정체 모를 무언가가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 속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음성이 마침내 새어나온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의문에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삶이라는 것이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삶이 되어야 할까?'


 그리고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 책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저의 가장 밝은 대답인데…… 더 밝은 대답을 써보고 싶어요.”


 이 작품이 한강 작가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가장 밝은 대답'인데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아주 밝은 것으로 읽히지는 않았다. 한강 작가가 묘사한 결말부,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장면에서 결국 둘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의 포옹과 일련의 스킨쉽이 우발적인 것에 가깝고, 둘은 인연은 찰나의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 놓을때 여자는 극도의 피로감(실제적, 물리적)을 느낀다. 그녀는 남자가 하는 말의 대부분을 붙잡지 못한다. 남자가 자신의 내면의 중핵에 해당하는 깊은 이야기를 터놓을 때, 그녀는 남자의 말에 집중하기 보단 어릴 적 자신을 충격에 빠뜨렸던 애완 강아지가 죽었던 사고를 떠올린다.  

 그리고 여자는 어떤 말도 듣지 못했으며 어떤 타인도 이해하지 않았다는 문장이 이어진다. 남자는 계속해서 듣고 있냐는 초조한 질문으로 여자에게 자신의 고백을 들어주기를 호소한다. 한강 작가 특유의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녀의 상황이 이 대화에서도 이어지는 것 같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는 문장에서 특히 그렇다. 

 여자는 목소리를 간신히 내는 것에 성공했지만, 언젠간 또다시 실어증이 찾아올 것이고, 남자는 지금 당장 여자를 향해 타오르는 감정을 느끼지만 그것이 지속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녀가 남자에게 마음을 다는 사실만으로 두 사람의 삶이 어떤 변곡점을 맞이하기에는 충분한 듯하다. 여자는 다가오는 남자가 두려우면서도, 그를 향해 한걸음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고, 이러한 과정에서 목소리를 내고야 만다. 

 두 사람의 인연은 찰나의 것이고 일순간적인 것이지만, 이 사건은 두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든 바꿔놓을 것이고,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원인 모를 실어증에 걸린 여자, 본인의 탓이 아닌 이유로 눈이 멀어 가는 남자를 보고 있자면 카뮈가 말한 부조리가 생각난다. 이들에게 찾아온 실어(失語)와 실명(失明)에는 이유가 없다. 어떠한 의미도 없고 원인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것들은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에게 찾아온 부조리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할까'라고 묻는 카뮈의 질문에 이 소설은 어떻게 대답하고 있을까?


 한강 작가는 동일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의 연한 부분에 대한 신뢰를 확인했다고 할까요. 두 인물이 구원 없는 세상을 살았잖아요. 서로 마주치는 순간, 소통할 때 자신의 가장 연한 부분을 꺼내잖아요. 손바닥에 글씨를 써준다든지, 서로 침묵하는 순간. 그런 것들이 인간 안에 있는 것이었는데, 그 연한 부분에서 삶을 시작되어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것이 바로 카뮈의 질문에 대한 한강 작가의 대답일 것이다. 영원히 빗겨가는 인간들의 운명 속에서 가장 약한 것들이 맞닿는 순간이 있다. 바로 그 순간 맞닿은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돌보고 삶을 지지해준다. 서로의 약한 부분을 꺼내어 맞닿고 소통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한강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말한다.

 한강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을 마치 어둠 속의 희미한 빛을 조감하는 남자의 시야처럼 희끗하게 그려낸 것 같다. 추락하는 삶의 궤도가 바닥을 찍고 차오르는 그 순간을 감각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마치 어둠과 빛이 묘하게 섞인 검은 공간 같다. 

 이 소설과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작가가 그리는 희끗한 사랑의 형태를 자신의 마음 안에서 발견할 수 있길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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