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날 좋아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내가 선택할게.
'하고싶다.'
파타고니아 매장에서 환한 건치 미소를 뽐내며 헤드셋으로 한쪽 귀를 마저 막으며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며 든생각.
아, 내 성욕은 내 안에 살아 있었구나.
이렇게 서론을 쓴다면 아, 이 저자는 성욕이 엄청 강한 사람이구나.
본능이 이끌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뭐 어떻게 생각 할 지 모르겠다. 그런데, 성욕이 부끄러운 건가? 인간의 3대 욕구가 아니던가?
그리고 말하고 싶은 것은 저런 일차원적인 본능적인 생각을 들게 해준 그 매력적인 남자분께 새삼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도 설레일 수 있는 감정 이라는 게 내 속에 살아 있음을
내 속에 살아 있는 그 감정으로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어 만남을 할 내 자신,
주체가 있음을
그런 말을 들어보았을 거다.
여자는 사랑받고 살아야 한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좋아해야 그 관계가 오래 잘 지속 된다.
나는 이 말속에서 가마니 처럼 앉아서 간택 당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수동적인 조선시대 여성상을 보았다.
이 말을 전적으로 틀린말이라고 치부하고자 하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이성의 관계에 있어서 주도는 남자에게 그리고 주체권은 남자에게 가 있는 전반적인 사상에 대한 약간의 울화이다.
고마웠다. 너의 고백이
고마웠다. 너의 마음이
고마웠다. 너의 진심이
고마웠다. 참으로
하지만 그 고마운 마음보다
다가와주는 사람들 중에 마냥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나의 시간을 투자해 데이트를 나서고 내 돈으로 무언가를 함께 하기도 하는데
고맙지만, 나의 선택이 아닌 너의 선택으로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노력과 비용을 쓸 수는 없다.
내가 너를 더 사랑하지 않을까 하는 옹졸한 마음보다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 라는 주체적인 마음으로.
너가 나를 육체적으로 탐하지 않을까 하는 피치못해 내어준다는 사회에 박혀 있는 그런 생각과 마음보다는,
내가 너를 육체적으로 원하는 아랫도리가 뜨거운 그 마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
상대방을 주체적으로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가져다 주는 반찬만 입을 벌리면서 맛있다고 느끼지도 못하며 그저 씹는 사람이 아닌
내가 먹고 싶은 반찬은 무엇이며, 그 찬을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재료들이 필요하며,
내가 그 재료를 가지고 어떠한 방법으로 요리를 했을 때, 내가 원하는 맛에 가깝게 나오는지
주체적으로 찬을 만들어 직접 스스로 먹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