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이란걸 이제는 못하게 된건지도 모른다. 방금 사서 개봉한 기다란 초코롤 과자가 와지끈 두동강나있는 모양처럼 말이다. 밥벌이로 내가 하던 마케팅 기획이란건 말하자면 거품계단을 짓는 일이었다. 그래, 이렇게 쓰면 되는데, 거품계단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놓고도 문장 한줄을 쓰질 못했으니 의아한 일이기도 하다. 고작 이 네 문장에 너무 많은 맥락들이 구불구불 얽혀있는건 한동안 생각해둔 주제로 글을 쓰지 못하고 낑낑 앓았던 시간탓일 것이다.
나름대로 야심이 있었던게 분명하다. 브런치 북이란걸 미리 기획해서, 성실하게, 연재라는 기능을 활용해 규칙적으로 글을 써나가려는 생각이었다. 지금 내가 참여하고 있는 공사작업에 대해서 그렇게 열댓편의 글을 쓰기로 하고 주제어도 모두 정해놓았건만. (거품계단처럼!) 그랬건만 그렇게 기획해둔 목차는 마치 거품계단처럼 한걸음도 실제로 오를 수는 없는 계단이었나보다. 사실 건축을 시작하기 전까지 거품계단식 기획은 꽤나 위력적이었다. 소비자의 마음 속에 보이지 않는 계단을, 몰래, 흡사 거품같은 무게의 가벼운 계단이 실존하는 것처럼, 만들어두고, 슬쩍 빠져나오는 그런 기획. 그래야만 했고, 곧잘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먼지 자욱한 공사장에서 짓고 있는 2층짜리 건물의 계단은 거품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단단한 목재를 치수에 따라 정확히 자르고, 겹치고, 못으로 단단히 고정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다. 그 계단을 하루에 몇번씩 오르내리곤 한다. 2층에서는 화재지연용 드라이월 설치 작업이 천장파트를 마치고 측벽으로 이어지고 있다. 1층에서는 주로 외관의 사이드 패널 부착작업이 한창이다. 나는 간간이 전체를 둘러보라는 마크 소장의 권유에 따라서 층을 오르내리며 현장을 둘러본다. 외벽의 한 좁다란 측벽의 사이드 패널 작업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면 남는 시간에 나무로 된 단단한 계단을 밟아오른다.
내가 밟는것도, 내가 오르는 것도 이제는 목재로된 굳건한 계단이건만 내 사고방식은 아직도 거품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듯하다. 물론 거품이라고 마냥 나쁜건 아니다. 주의를 끌고 선택을 유도해야만 살아남는 시장 경제 속에서 (Attention economy..!) 거품은 아주 가볍게, 소리없이, 그리고 값싸게 멀리까지 날아가는 매체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소비자가 어디에 있건 그곳까지 소리소문없이 날아가서 퐁 하고 터진뒤, 그 속에 브랜드가 응축시켜둔 메시지의 그윽한 향을 조용히 전달하고 사라진다. 그게 거품의 세계다.
나는 거품의 세계를 떠나 지상으로 내려왔다. 비누방울 거품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발붙이고 선 세계의 바닥면이 어떤 모습인지 묻기 위해서였다 - 하고 말하면 그건 뻥일 것이다. 그렇게 거창한 생각같은 것 없이 거품의 세계에서 숨쉬기 위한 산소통이 다하여 뽁 하고 어디 비닐막이 터져서 내려앉는 쇠구슬처럼 건축의 세계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방울방울 비누방울 거품이다. 이 글의 문장들부터가 이미 몽글몽글 거품 속에 갖힌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걸 보면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제 내가 발붙인 세계에서 거품 계단으로 오를 수 있는 층따위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단단한 계단을 지어야만 한다. 철판이나 합판처럼 단단한 재료를 그보다 더 단단한 연결장치로 고정한 그런 계단을 지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아메리칸 에어라인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지없이 거품을 날려온다. 호주행 비행기가 970달러 - 절찬리 세일 중이라는 메시지다. 그러나 나는 이제 메시지를 짓지 않는다. 메시지가 날아다니는 세계의 뒷편에 조용히 잠자코 있는 배경을 짓는다. 메시지처럼 주목받지 않지만, 주목하고 주목받는 행위가 일어나는 배경이 되는 공간을 짓는다.
아침 7시, 공사장으로 나가자. 주먹만한 줄자로 측정한 공간의 규격에 따라 테이블에 설치된 전기톱을 돌리고 유압식 못질 장치 - 네일건의 방아쇠를 당긴다. 그렇게 거품을 하나씩 하나씩 터뜨려 간다. 적잖이 내려않는 듯한 활강의 감각이 나를 덮쳐오겠지만 그렇게 추락하여 도달하는 곳은 단단한 계단일 것이다. 거품이 그렇듯이 추락 역시 언제나 나쁜것만은 아니다. 제자리를 향해가는 추락이라면. 그렇게 마흔의 공사를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