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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Jun 26. 2024

매콤 줄자

빨간색 25피트짜리 밀워키 줄자를 이제 내가 가지라고 마크는 말했다. 봉사자들은 공용 공구함에서 매번 되는데로 줄자를 꺼내쓰고 돌려놓는 식이지만 이제는 내 전용 줄자가 생긴 셈이다. 돌아보면 퇴사할때 제작팀 동료가 선물해준 줄자도 빨간색이었다. 일본어가 쓰여있는 미터식 줄자였다. 그때는 건축이며 공사현장에서 줄자를 쓸일이 이렇게 많은줄 몰랐었다. 건축을 몰랐다.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빌바오처럼 춤추는 조각이기 전에 정확한 측정이고 정확한 재단이었다. 


마크 소장이 쥐어준 빨간색 줄자에는 'Wide Blade'라고 쓰여있다. 줄자의 너비가 아주 넓다는건데, 그렇게 넓은 철재 줄자가 25피트 - 약 7.5미터나 감겨있다보니 제법 묵직할 수밖에 없다. 칼국수처럼 넓게 말린 묵직한 쇳덩어리를 오늘은 공구함에 반납하지 않고 집으로 가져왔다. 꽤나 오래된 물건일테고, 여기저기 긁히고 꾀죄죄한게 현장에서 그만큼 굴러다닌 티가난다. 알콜묻은 솜으로 표면을 쓱쓱 닥았다.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먼지인지 흠인지 구분이 되지않는 부분이 대부분이다. 분명 보기엔 먼지인데 화석처럼 줄자의 일부가 되어있다. 


시간과 중력은 어딜가나 빠지질 않는다. 2019년 만들었던 나의 포트폴리오에도 있었고, 오늘의 태양 작렬하는 공사현장에도 있었다. 시간과 중력의 영향권에 있어서는 먼지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만큼 묵직한 먼지다. 마치 줄자라는 행성이 오랜시간 잡아당겨 퇴적된 지층인듯한 묵직한 먼지다. 


오늘부터 두번째 건물의 프레이밍이 시작됐다. 컨크리트로 다진 바닥에 그려놓은 레이아웃 위로 본격적으로 목재 구조를 세워나간다. 벽도 지붕도 없는 공간에 이제 막 벽이 하나씩 올라가기 시작한다. 벽을 만드는 방식은 다소 당혹스럽다. 각목을 벽의 한쪽 면에 해당하는 너비로 차례차례 하나씩 잘라서 배치한다. 중간중간 무게를 지탱하는 기둥 역시 하나하나 배치한다. 창문이 있으면 창문을 둘러싸는 테두리용 각목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각목과 각목을 잇기위해 못을 박는다. 하나씩 하나씩 박는다. 그렇게 한쪽벽이 바닥에 뉘어진 채로 완성되면, 벽체를 지면과 수직으로 세워서 고정한다. 하나씩 세워나간다. 


일단 보고 들은뒤에는 그 방법 뿐이란걸 납득하지만, 각목이며 못이며 하나씩 하나씩 해나간다는게 당혹스러운건 어쩔 수 없다. 늘 세워진 뒤의 모습만 봐오던 그 거대한 벽체가 사실은 한손에 잡히는 작은것들로, 천천히, 한땀한땀 만들어진다는 이유일 것이다. 옷한벌도 따지고보면 한올 한올의 실로 만들어진다는걸 굳이 의식하지 못하는것과 비슷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오늘 정확히 몇개의 못을 박았는지 가늠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알이 베인건 팔이 아니라 두 다리다. 벽체 프레임을 세운 뒤에는 대여섯명이 함께 들어올려 벽이 자리잡을 정확한 위치에 박힌 앵커들 위로 옮겨 끼워넣는 작업이 필요하다. 벽체 프레임의 최하단 각목에 앵커가 들어갈 구멍들을 드릴로 가능한 정확히 뚫어뒀지만 한번에 쏙 들어가는일은 거의 없다. 매번 구멍들을 들여다보고 앵커의 대가리가 보이지 않으면 망치로 앵커를 조금씩 휘어서 맞춰야 한다. 그리고 나서도 벽체 상단을 훨씬 큰 해머로 두더지 잡듯이 힘껏 두드려야 앵커는 드릴 구멍을 조금씩 관통해 들어간다. 


지붕없는 캘리포니아의 한낮햇살은 이글거린다. 자주 물을 마시고, 또 땀이 흐른다. 그렇게 땀흘려 벽체를 짜도 정확히 직각을 맞춘 사각형을 구현하기는 쉽지않다. 사각형의 두 꼭지점을 잇는 두개의 사선의 길이를 비교함으로써 직각 여부를 판단한다. 조금이라도 각도가 틀어져서 마름모 비슷한 모양이 되면 두 길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모양은 둘째치고 존재하는 모든걸 내리당기는 중력의 힘으로 벽이 내려않는건 시간문제가 된다. 모든건 사실 중력을 벗어날 수 없다. 모든건 결국 시간문제다. 


때려박아! 때려박아! 멀리서 내가 못질하는걸 보고 마크는 격려하듯 독려하듯 소리친다. 그러나 아직 나는 열댓번은 휘둘러야 못하나가 온전히 들어가 않는다. 압축 가공된 6센치 두께의 각목에 못이 좀처럼 들어가지 않아서. 마크는 짧은 흰머리를 날리면서 날아오듯 걸어와서 못을 박아넣는다. 한번, 두번, 세번이면 못대가리가 각목속으로 쑥. 슝. 마크가 뭘 하면 그건 다 매운맛처럼 다가온다. 말도 맵고 망치질도 맵고 쥐어준 뻘건 줄자도 맵다. 길게 빼냈다가 끝을 놓자마자 슈루루룩 빨려들어가는 혓바닷이 꼭 매운걸 먹고나서 불에대인 심을 삼키는 입처럼. 시간은 매운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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