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는 시간과 생각에 대한 생각들
(전쟁같던) 건물 1층 프레이밍을 거의 마치고나서 느슨한 한주를 보냈다. 미국 독립기념일이 휴일인데다 다음날 금요일도 연달아 공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나는 때마침 작업에 쫓기는 대신 찬찬이 현장을 둘러보고 싶던 의중을 소장에게 전했다. 토요일 하루는 그렇게 보내게 됐다. 뙤양볕 아래에서 못질하고 다함께 세워올린 벽체 사이를 돌아보며 도면과 이리저리 비교해 보는 시간이다. 무슨 일이든 이따금씩 잠깐씩 멈춰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창밖에 빌어먹을 자동차가 시동이 안걸려서 멈춰선 모양인데, 저런꼴이 나지 않으려면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하겠다.
없는 것들에 매달린 시간이기도 했다. 건축 도면에도, 구조도면에도 직접 표기되지는 않는 스터드(각목 기둥)의 간격을 하나하나 다 측정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가로 4센치, 세로 9센치, 높이 2.3미터가량 되는 기둥들이 16인치(약 40센치) 간격으로 세워진다. 건물 상부의 하중을 버텨줄 벽체의 중요한 뼈대가 되는 요소다. 물론 구조 심사과정에서는 최대 19인치까지 간격을 허용해주기 때문에 무조건 16인치로 유지해야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안정적인 선에서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작업하는게 좋다. 한번 기준으로부터 멀어져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어느정도의 오차가 유지되는게 아니라 점점더 오차가 커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말하고 보니 납득이 된다. 엄밀히 말하면 19.2인치를 넘어가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인데, 왜 굳이 16인치 간격이라는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하는 원칙으로서 세우고 모든 작업자에게 각인시키는걸까. 공사 현장에 들어서면 이렇게 별것 아니지만 한번 반문하기 시작하면 뾰족한 답이 없는 질문들이 수두룩하게 쏟아진다. 비유하자면 뉴진스 노래가 명상이나 생각 정리에 그리 어울릴만한 노래는 아닌데 어째서 나는 요가 매트 위에서 뉴진스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 생각을 정리하는지 - 정리할 수 있는건지와 같은 질문들이다.
참 신기하게도 그런 류의 질문들은 현장의 공기를 연료로만 답을 얻을 수 있다. 직접 콘크리트 지반위에 서서 손가락을 들어 그곳을 가리키면서 묻다보면, 질문을 하는 중간에 답을 스스로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 아니 저 헤더는 왜 도면보다 2인치 길게 설치해놓은거냐고? (*헤더: 창문이 설치될 벽체 상단에 설치되는 두꺼운 나무통) 혹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질문을 품다가 다른곳 못질을 하다가 불현듯 - 아니 불현듯이라기엔 너무 자연스럽게 답이 공기처럼 머릿속으로 쑥 스며들기도 한다. 헤더는 이웃한 헤더와 높이를 통일 시킬수만 있다면 2인치정도 변경하는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당연한 답안들 말이다.
생각해보면 생각이란게 그렇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생각이든 할 수 있다면 참 편리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생각들은 꼭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 중간에만 마주하게 된다는게 맹점이다. 예전에는 생각이란 컴퓨터의 CPU가 돌아가듯이 물리적인 현실 환경과 전혀 별개로 자판으로 타이핑해넣는 문장의 집합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갈수록 그런 생각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다. 생각이라고 늘 추상적인게 아니라고. 어떤 생각들은 꼭 세상의 바람이라던가, 햇볕이라던가, 빗줄기라던가, 혹은 타인의 목소리 울림이라던가 하는 구체적인 것들을 타고 들어오는 거라고.
오늘은 그런 점에서 예외적인 하루다. 요즘들어 보잘것 없는 문장 몇줄을 적는데에도 장소의 힘을 늘 빌렸었지만 오늘은 방 안에서 두드리는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USC 캠퍼스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익어가는 석양 씩이나 되는 고급스런 시간과 환경 속에 나를 놓아야만 자판을 두드릴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내방의 작업용 책상에 앉아서 쓰는 것은 아니다. 까만 작업용 책상은 모니터만 세대에 무선 마우스, 무선 키보드로 복작거린다. 반면 바로 맞은편에 붙여둔 텅 빈 노란색 합성목재 책상은 텅 비어있다. 그 위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는다. 그리고 복작거리는 까만 책상에서 지칠때에만 이 텅 빈 책상에 앉아서 시간을 보낸다. 오늘의 글쓰기도 그런 시간 보내기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동안 멈춰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데에 야박했다. 생각은 해봤자, 할수록, 나오는건 없고 시간만 지나는 거라고 여겼다.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말로 멈출 수만 있다면 생각할 시간을 갖는일은 꼭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동시에 그동안은 제대로 멈추지를 못했던 것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