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을 알고있는 미래를 살아가는 건축
지도를 통해 발로나 크릭(Ballona Creek)의 물줄기가 플라야 델 레이 해변의 바다에 이른다는걸 알았다. 앱에서 긴 물길을 따라 굵은 녹색으로 이어져가는 선은 자전거 전용 도로라는 뜻이었다. 그리 길지 않지만 멋진 자전거 여행이 될거라 생각했다. 지하철을 타고 컬버 시티에 내려서 자전거 도로가 시작되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실망했다. 개천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할만큼 큰 폭의 시멘트 구조물로 인공조성된 물길이었다는게 첫번째 이유, 거기에다 그 거대한 폭에비해 흘러가는 물은 한가운데 손바닥 정도 될법한 폭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가뭄에 바닥이 다 드러난 흉측한 인공수로 시설처럼 보였다. 물론 LA에 가뭄이랄게 없다고 쳐도 기대에 영 못미치는 길이었다. 자전거 도로를 끼고 적당히 우거진 숲이 그들을 드리우고, 저 아래로 물줄기가 졸졸졸 흘러가는 우리나라의 계곡을 상상했던 것이다. 자전거 도로역시 삭막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인지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오분은 달려야 한두명을 지나칠만큼 뜸한 길이었다. 아마도 '이번주 휴일 기행은 실패'라는 메모를 휴대폰에 적어넣게 될 모양이었다.
그래도 계획한 여정인만큼 페달을 성실하게 밟았다. 하지만 할인행사에 혹해서 샀지만 정작 너무 맛이없는 음료를 또 막상 버리긴 아까워서 꿀꺽꿀꺽 맛도 모르고 넘겨 치우는 식의 의무적인 페달링이었다. 가뜩이나 드문 인적에 한번씩 지나쳐가는 사람들 역시 여가를 즐긴다기 보다, 어디서 훔친 자전거로 부랴부랴 어딘가로 이동하는 길위의 사람들처럼 보였다. 얕은 실망감의 색이 점점 바뀌어 가기 시작해서, 까마귀 수백마리가 널찍한 수로 여기저기에, 또 오른편 야지에 앉아서 내눈엔 보이지 않는 먹이를 먹고, 또 푸드덕 날아다니는 모습을 마주할 때 쯤에는, 깊은 불안감이 되어있었다.
어떻게 매일 타는 지하철을 반대방향으로 탈 수 있는건지, 매번 내리는 역을 뻔히 눈앞에 두고도 지나쳐버리는지 의문. 언뜻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직접 겪어봐야만 납득할 수 있게 되는 일들이 있다. 두 손으로 만져봐야만 알게되는 것들, 몸소 뛰어들어서 부딪혀 봐야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 때로는 세계를 머리로 이해하기보다는 두손의 감촉과 육체의 감각을 통해 이해하는게 아닌가 의아해 지는 순간들.
지도에 출발점과 도착점이 뻔히 찍혀있는 코스를 우리는 왜 굳이 찾아가서 달리는지. 영화 컨택트에 등장하는 미래와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인지하는 외계인들은 어째서 뻔히 아는 삶을 다시 또 살아가는지. 외계인들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완전히 스포당한 주인공 역시 어째서 알고있는 미래를 굳이 몸으로 살아가는지. 우리는 어쩌면 안다는 말을 좀더 세분화해야할지도 모른다. 출발점과 도착점을 설정하면 자동으로 코스를 검색해 보여주는 지도앱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알 수 있나. 100% 적중률을 자랑하는 예언가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예정된 시나리오에 따라 실제로 펼쳐지는 세계를 우리는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은 건축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흰 종이에 그려진 까만색 벽과, 벽으로 둘러싸인 방과, 방을 드나들게 해주는 사람을 위한 문과, 바람과 빛을 위한 창문들에 대해서 안다는건 어떤 뜻인지. 추상화된 도면을 읽는 것으로 알 수 있는 세계와, 직접 땀흘리며 이것저것 이고지고 망치를 휘두르며 도면에 점지된 미래를 향해 세워져가는 공간을 체험하는 것으로 알 수 있는 세계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 아직 2층 바닥면이 깔리지 않은채로, 일렬로 길게 늘어선 빔 사이를 통과해 1층 바닥을 때리는 햇볕의 눈부심같은게 도면위에 기록될리 없고 기록될 여지도 없다.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발로나 크릭이라는, 이름만 그럴싸한 초라하고 삭막한 인공수로를 지나서 결국은 태평양 해안에 이를줄 지도를 봐서 알고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하던 이미지가 깨지고, 두려움에 휩싸이고, 포기의 유혹에 흔들리는 등의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바다라는건 구글맵에서 손가락 하나 휘둘러 찍어내리던 그 바다와는 달라도 꽤 많이 다르다는 것. 당분간은 들춰보지도 않을 사진이며 영상을 그렇게나 많이 찍어댈만큼 마음을 사로잡는 바다가 기다릴줄은 몰랐다는 것. 황급하게 쓰는 결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이 넘쳐나는 세계라는 것. 그리고 오늘의 현장 공사작업 역시도 정확히 내 예상을 빗나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