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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도리진 Jun 09. 2024

홍세화 님의 <생각의 좌표> 리뷰

더 풍요로운데 더 자유롭진 못하다고 느껴지는 세태에 관하여

제가 대학생이었던 시절을 회상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장면들이 있습니다.

낮에 비가 오는 데, 학교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장면.

밤에 친구와 둘이서 또 술을 마시던 장면.

친구와 버스 맨 뒷자리에서 회수권(버스 쿠폰)과 동전을 헤리던 장면.

그리고 시험에 대한 기억들.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았던 것일까요.

무슨 가슴 아픈 사연이 그리 많았던 걸까요.


그래도 그 시절에는 저희의 삶의 고뇌와 더불어, 불안한 민중의 삶과 그 불안함을 만들어 내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울분과 걱정, 해결점을 찾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지금처럼 대놓고 천민자본주의가 판을 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2024년 현재 이렇게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가는 이유는 사회안전망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사람답게 살려면 의료와 교육, 주거가 위협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소득을 스스로를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돌아보고 연대를 할 마음의 여유가 생겨납니다. 하지만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우리 나라의 기득권들은 그게 싫었나 봅니다. 다른 나라에서 1인당 국민소득 6, 7천불에 실시했던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를 아직도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차피 이것은 의자 뺏기 같은 게임이라 모든 사람이 기득권이 될 수는 없기에 고소득층이 세금을 많이 내서 저소득층의 삶을 지지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시스템적인 유불리를 외면한 채 모든 성공과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개인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이겨내라고 말합니다. 역사상 가장 돈 벌기 쉬운 시대라고 말하면서 개인 시간을 갈아넣어 n잡을 해서 성공하라고 말합니다. 잘살지 못하면 그냥 게으르고 무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는 동네와 아파트 이름이 개인을 판단하는 잣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합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요. 미국처럼 어느 손가락을 살릴 지 결정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쉽고 아픈 것이 사실입니다. 지나친 사회보장은 물론 개인을 나약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워서 많은 사회 구성원을 외줄타기의 삶으로 밀어 넣는 것은 옳은 일일까요.




'내가 생각하는 바'가 지배세력의 기획에 의한 세뇌가 아닌지 의심해 본다는 발상은 그래서 합리적입니다. 그 세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늘 의심해야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또한 많은 책들을 읽고 사람들과 토론하며 인풋을 주고 아웃풋을 내야 합니다.


홍세화 님에게 있어서 독서란,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 중 책을 남긴 사람의 생각을 내가 주체적으로 참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토론하고 직접 견문하고 성찰하면서 살아가려 한다고요. 그 중에서도 독서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눈과 귀가 접하는 세계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인간다운 삶과 생존권을 지키고 나를 둘러싼 시민들이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매체에 휩쓸리지 않도록 비판적 의식과 안목을 갖고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에 대해 물었을 때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가족을 말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돈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돈이 있어야 가족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삶이 절박하고 여유가 없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몰아가는 시스템을 변혁하기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 부의 편중을 당연시 하지 말고, 모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요구해야 합니다. 연대를 포기하면 기득권층은 누군가의 절망을 당연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일이 더이상 반복되어서안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은 결국 우리 사회 전체를 병들게 니다. 물질에 관한 관심과 소유욕은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을 지킬 만큼이면 될 것입니다. 인간 존재 자체나 자아 실현에 대한 성찰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사회이기를 우리 모두는 바라고 있습니다.


생존 자체가 목표인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 양극화를 해소해야 합니다. 선행과 나눔에 기대는 구걸이 아니라 분배의 제도화를 원합니다. 미국과 같은 사회를 지양하고 북유럽과 같은 인간적 삶이 가능한 나라를 지향하는 것이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낸 세금이 나에게 돌아온다는 확신을 주는 정책, 사회 안전망에 대한 경험이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올바른 시스템에 대한 고민과 실행 없이는 지배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정치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은 결국 우리의 존엄과 품위를 앗아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하는 우리를 둘러싼 미디어와 세계관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휴머니즘과 연대 의식, 깨어있는 지성이 필요합니다.


낭만과 연대(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와 인간적 존엄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를 진정 희망합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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