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어야만 하는 현실

by 수윤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갑작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면 이런 말을 한다.

'이건 꿈일 거야. 아니 꿈이어야만 해.'


분명 장갑을 끼고 일을 했는데, 장갑이 없었다. 장갑이 있어야 할 자리엔 덩그러니 맨손이 놓여있었다. 오른쪽 검지 손가락이 절반 없어진 채로. 눈앞에 벌어진 이질적인 모습에 멍하게 손을 쳐다보며 '꿈인가?' 생각했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나는 곧장 비명을 질렀다. 현실이란 걸 알고 나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나의 비명을 듣고 돌아보는 놀란 엄마의 얼굴,

안된다며 소리치며 달려오는 아빠의 모습.

헤드폰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BTS의 '봄날',

꼭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내가 영화로 봤다면, '아.. 안타깝다.'라고 이야기했을 장면.


엄마, 아빠는 나를 얼싸안고 어쩔 줄 몰라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안된다'만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너무 많이 잘렸다며 이거 어떻게 하냐고 덜덜 떠는 아빠 대신 직원들이 119를 불렀다. 부모님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쓰고 있던 헤드폰을 벗겨달라고 이야기한 뒤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엄마는 그새 장갑 안에 들어있던, 원래는 내 것이었지만 지금은 내 것이 아닌, 잘린 손가락을 찾아왔다. 엄마 손수건 위에 올라간 내 손가락은 창백하고 납작했다.


119가 늦어져 아빠 차를 타고 병원에 가기로 결정했다. 차 뒷 문을 열자 눕혀져 있는 바이올린 케이스가 보였다. 레슨 다녀와서 차에 넣어두고 깜빡한 거였다. 병원으로 이동하며 이제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바이올린 연주, 열 손가락으로 치는 타자,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 고통보다는 슬픔이 밀려왔다. 감정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죽는 거 아니야. 괜찮아."

"손가락 하나 없어도 다 먹고살 수 있어, 걱정하지마."


나를 달래는 사이 병원에 도착했다. 어느새부턴가 몸을 덜덜 떨고, 턱을 딱딱 부딪히고 있었다. 너무너무 추웠다. 춥고 아팠다. 손가락이 아픈 게 아니라 오른팔 전체가 아파왔다. 오른팔 전체가 타는 듯했고, 손가락 밑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손가락은 이제 없는데... 빨리 진통제라도 맞고 싶었지만, 응급실에서는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코로나가 한창 심할 때였고, 병원 절차상 코로나 음성이 나와야 병원에 출입할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병원에서 대기 줄을 뚫고 먼저 코로나 검사를 받을 수 있게 조치해 주셔서 빨리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코로나 검사를 받으며 작은 소동이 있었다. 나를 줄 맨 앞에 세우니 뒤에서 항의하는 소리가 있었다. 볼멘소리가 아니라 따지는 듯한 말투였다. 수술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엄마가 말을 했지만, 불만은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엄마도 화가 나서 무어라 따지려고 하는 순간, 항의하던 여자분이 '남편이 열 손가락 다 절단되어 왔다. 당장 보호자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언뜻 응급실 앞에 나보다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분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양손에 붕대를 감고 계셨다. 각자 다 간절한 사정이 있다.


작은 소동을 뒤로하고 무사히 코로나 검사를 끝냈다. 밖에서 얼마나 더 대기하고 있었을까. 드디어 들어오라는 의료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부모님은 코로나 검사를 하지 않아 들어오실 수 없고, 나만 들어오라고 했다. 걱정 말라며 응급실로 혼자 들어갔지만, 사실은 부모님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무서웠다.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소독약을 부어 손을 소독했다. 종이에 손이 베었을 때 느껴지는 따가움을 생각했는데, 그냥 화~한 느낌이 들았다. 박하사탕을 입에 넣었을 때 느껴지는 시원함과 같은.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아프면 뇌에서 고통을 상쇄해 주기 위한 호르몬이 나온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인가 보다.


소독을 하고 침대에 누워 드디어 수액을 맞았다. 너무 덜덜 떨어 간호사가 바늘을 꽂는데 애를 먹었다. 수술 준비를 위해 귀걸이와 피어싱을 뺐다. '아.. 피어싱 겨우 자리 잡았는데...' 응급 상황에서도 이런 생각이 드는 내가 조금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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