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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신적 거리두기

도연명(陶淵明)의 '술 마시며 5(飮酒 其五)'

by 장동원

지난 주에는 원호문(元好問)의 '영정을 떠나며(潁亭留別)'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 시의 "차가운 파도 맑게 이는데 흰 새 아득히 내려가는구나"라는 구절은 근대의 문학 비평가 왕국유(王國維)가 무아지경의 명구라고 극찬한 두 구절 중 하나입니다. 오늘은 다른 한 구절을 읽어보고자 합니다. 도연명의 '술 마시며(飮酒)' 연작 중 다섯 번째입니다.


도연명의 '술 마시며'는총 20편의 시로 구성된 연작입니다. 각 작품 사이에 유기적인 연관성은 보이지 않으나, 도연명의 인생에 대한 태도를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술 마시며'라는 제목과는 달리 술을 마시는 내용이 반드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을 쓰는 당시에 실제로 한 잔 하고 있었기에 술 마시며라는 제목을 붙였을 수도 있고, 혹여 정치적으로 위험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으로 읽히더라도 "술 마시며" 쓴 것이라 실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그렇게 붙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結廬在人境 "사람들 사는 데 초가집 지었으나

而無車馬喧 수레 소리, 말 소리 시끄럽지 않습니다."

問君何能爾 "그대에게 묻습니다. 어찌 그럴 수 있는지요?"

心遠地自偏 "마음이 멀어지니 땅이 절로 외진 곳 되더군요.

採菊東籬下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보니

悠然見南山 어느새 남산이 보입니다.

山氣日夕佳 산의 기세 날 저물어가며 아름다워지고

飛鳥相與還 날아가는 새도 서로 짝지어 돌아옵니다.

此中有真意 이 가운데 참 뜻이 있는데,

欲辯已忘言 말하려다 이미 잊어버렸습니다."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술 마시며 5(飮酒 其五)'


화자의 역설적인 발언으로 시를 엽니다. 사람이 많이 사는 곳에 산다면, 온갖 소리로 시끄럽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화자는 시끄럽지 않다고 합니다. 심지어 시끄러운 수레와 말이 다니는 소리도요. 화자가 사는 집이 구중궁궐 깊은 곳이라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화자가 사는 곳은 "廬(려)"입니다. 이는 오두막 같은 느낌을 주는 작은 초가집입니다. 집 앞을 오가는 발소리 하나까지도 들릴 법한 허술한 곳에서 지내면서도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답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신기하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묻자 화자는 "마음이 멀어지니 땅이 절로 외진 곳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화자는 반대입니다. 남들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 물리적인 거리를 두는 것에 비해 그는 마음의 거리를 설정함으로써 물리적인 가까움을 없애버립니다. 마음을 바깥에서 돌아가는 일들에 두지 않으니,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집니다.


세상의 소란에 들지 않는 화자는 그저 자신의 공간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따름입니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풍경을 바라봅니다. "어느새(悠然)" 보아진 풍경이라는 말에서, 화자의 정신적 경지를 느끼게 됩니다. 화자는 무엇을 볼까, 무엇을 할까 번민한 결과로 그 풍경에 다가간 것이 아닙니다. 풍경처럼 고요하게 일상을 살아가다 허리를 펴보니 눈 안에 그것이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왕국유는 이 구절을 무아지경의 명구라고 극찬했던 것입니다.


눈에 든 풍경은 해가 저무는 시간입니다. 저물녁이 되면 남은 길을 다 가고, 남은 일을 마칠 생각으로 조급해지곤 합니다. 그렇지만 화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완상합니다. 그저 짝지어 돌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뿐입니다. 이 구절은 시인 도연명의 삶을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도연명은 몇 차례 관직을 얻으려 나갔지만, 끝내 돌아와 평생을 농사지으며 은일의 삶을 즐겼습니다. 저물녁 돌아오는 새의 모습은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을 투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이 가운데 참뜻이 있는데 잊어버려 말로 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 구절에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말은 뜻을 다 담지 못한다(言不盡意)"라는 중국의 전통적인 언어관이 담긴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특히 도가 사상에서 중시된 이 주장은 쉽게 전해지지 않는 깨달음의 경지를 강조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석하자면 화자는 깨달음의 경지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둘째는 정치적인 위험 때문에 말을 더 하지 않고 맺어버렸다는 해석입니다. 관직에서 물러난 그가 관직을 떠나는 것을 예찬한다는 것은 정권에 반대한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두 해석은 왠지 시의 맛이 살지 않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이미 앞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으니, 시를 완상하며 그 경지에 빠져들기를 청하는 권유로 읽습니다. 과연 그가 다 표현할 수 없는 경지이며, 말을 아껴야 할 내용이었다면 그 앞에 이야기한 것은 무엇이 될까요? 게다가 화자는 "이 안에" 참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누리는 정신적 경지를 이 시의 구절 속에 담고 있으니 이를 통해 함께 누리자는 말 아닐까요.


소란스러운 나날이 언제부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극적인 뉴스, 영상, 글들이 정신을 어지럽힙니다. 아마 날로 심해지면 심해지지, 갑자기 줄어들지는 않을 텝니다. 이런 시절에 도연명이 이야기한 것과 같이 마음을 멀리해, 절로 멀리 떠난 것처럼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도연명의 이 권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루하루의 삶을 잘 살아가는 힘이 될 것입니다.


chengduhuanglongxiguzhenchenjiashuiniannianfangcaowu_10827483.jpg.400.jpg 중국 남방의 초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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