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끝난 다음 날, 무얼 했다고 긴장이 풀어지며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날씨마저 꾸물 꾸물하고 운동도 오늘은 쉬어야 한다. 그냥 거실 소파에 몸을 맡기고 아주 편안한 자세로 책이나 읽을까 하고 무릎에 쿠션을 올려놓고 책 한 권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나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긴다. 참 편안하다. 조용한 음악이 더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10층 아파트다. 거실에 티브이만 켜지 않으면 집은 적막강산이다. 베란다 유리창을 넘어 들어오는 가을 햇살은 포근하고 포실 포실하다. 나는 이런 시간이 참 좋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 고요가 나를 감싼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지금 내 나이가 자유롭고 마음이 가볍다.
나이 들면서 누구를 따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말자고 다짐을 하지만, 그 다짐이 쉽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혼자 살 수 없기에 가끔은 원하지 않아도 내 의사와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출판 기념회 날 오신 시 낭송회 회장님이 사인을 받은 책을 놓고 가셨다. 회장님은 시 낭송회 카톡방에 톡을 남기셨다.
"내일 시간 되시는 분은 ㅇㅇ님 남편의 행사에 시간이 되는 분은 참석하시게요." 아, 그렇구나 책을 전해 줄 방법을 생각했는데 그곳에 가면 회장님을 만나 책을 전해 줄 것 같았다.
점심을 먹은 오후 시간, 나른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머리손질도 귀찮아 모자 하나 눌러쓴다. 옷은 가을 색인 커피색 원피스에 머플러 하나 두르고 나서면 금방 가을 여인이 된다. 신달자 시인이 말했듯이 나는 아직 여자이고 아직도 아름다 울 수 있다. 인생의 어둠과 빛이 녹아든 내 모습을 나는 좋아한다. 특별한 멋을 내지 않아도 사람은 그 사람에게 풍기는 향기가 있다. 나는 아주 눈에 띄는 의상보다 소박한 차림을 하는 걸 좋아한다.
무슨 행사를 하든 사람 모이는 것이 문제다. 나는 그걸 잘 알기에 조금은 귀찮아도 참석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행사장을 찾아갔는데 사람이 많이도 모였다. 그곳에서 아는 사람도 많이 만났다.
회장님 만나 책만 건네주고 오려했지만 그게 쉽지 않다. 한두 시간을 그냥 그곳에서 흘려보낸다. 집으로 그냥 올까 말까 망설이다가 참아낸다. 한 동안 시간을 보낸 후 회장님과 나는 오후 늦은 시간이지만 지인이 행사를 한다는 청암산을 찾았다. 사람과 너무 거리를 두는 것도 정 없어 보인다.
청암산을 도착하니 늦은 시간이라서 행사장을 정리를 하고 있었다. 지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인사를 한 뒤 우리는 호수 둑길을 걸으며 가을을 느낀다. 지금도 억새는 곱게 피어 너무 아름답다. 더욱이 낮에 만나는 억새와 저녁 무렵 보는 억새는 느낌이 다르다. 하늘의 구름도 땅의 대지와 가까워 아늑한 분위기라서 더 좋다.
청암산 저녁때 보는 억새 밭
나무 들은 가을에 물들다
나무들도 이제는 곱게 단장을 하고 가을 색을 띠고 있어 너무 예쁘다. 신은 어쩌면 이리 고운 물감으로 자연을 물들이는지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다. 지금까지 몰랐던 인연, 시 낭송 회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산길을 걷는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인연과 만남을 하고 산다.
시를 낭송하고 문학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감성이 다르다. 나이가 들어도 멋지다. 서로의 감성이 잘 맞아서 그런지 대화를 해도 오래된 인연처럼 마음이 편하다. 이렇게 또 시절 인연을 맞는다. 가을 어느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그래, 너무 마음 문을 닫고 살지는 말자.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또 다른 기쁨을 얻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