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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77세
아내, 엄마, 할머니 아닌 '나'를

시니어 클럽에서 붓글씨를 쓰고 이어서 그림일기를 배운다

by 이숙자

딸은 어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고 내게 말했다.


"엄마, 일주일에 세 번, 복지관에서 붓글씨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을 구한다는데 엄마가 하시면 어때요?"

라며 물어본다.


"그래, 붓글씨? 쓴 지 오래돼서 잘하지 못할 텐데."


"연습해서 하면 된대요, 가훈 써주는 일이라고 해요."

나는 용기를 내서 시니어 클럽에서 붓글씨 연습을 하게 되었다. 삶은 의도치 않게 우연히 방향을 틀게 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내 나이 77세, 나는 이제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같았다.


다음 날 담당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다.


" 어르신, 시니어 담당인데 내일부터 나오 실수 있으신가요?" 전화를 받고


그렇게 일주일에 세 번씩 시니어 클럽에 나가게 됐다. 하루에 세 시간씩, 두 사람이 같이 하는 일이다. 나와 함께 하는 분이 또 있는데 나이가 여든이 넘으셨다. 젊어서부터 서예를 하셨다고 한다. 연세가 많은데 자기 취미를 오랫동안 이어오고 있다.


옛날 같으면 자식에게 살림을 맡기고 대접받을 나이인데,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했다. 지금은 모든 걸 자신이 책임지지 않으면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현실이다. 내 나이도 노인이다. 그런데 내 마음은 아직 노인이기를 거부하니 참 웃음이 나온다.


나는 다시 초보 붓글씨 연습생이 되어 또 다른 삶을 향해 도전을 시작했다.


이제는 지난날에 초연하려 한다. 과거를 버려야만 미래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나의 삶은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한 과정으로 창문을 열어두고 바람이 불어오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새로움 이란 약간은 설레고 두려움이 동반한다.


모든 일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면서부터 연결된다.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어딘가에서 내가 필요로 한 곳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다. 용돈까지 생기는 일이라니 이것은 '꿀팁'이었다. 삶을 창의적으로 살 수 있고 활기 있는 생활로 이어지니,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인 것이다. 사람의 행복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소박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자기 자리에서 해내고 만족감을 느끼는 일도 행복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가 앉은자리가 꽃자리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하루라는 시간의 길이를 늘렸으면 좋겠다. 해야 할 일이 잔뜩이다.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 할 일이 없어 외롭고 허허로움 속에 보낼 수 있는 노년의 나이인 내가 이처럼 하고 싶은 일이 많고 바쁘게 살고 있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사람은 적당히 긴장할 때 정신력이 강해지면서 마음이 단단해지는 듯하다.


실은 내가 요즘 그렇다. 코로나 19라는 감염병으로 중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딸네 가족과 살게 되면서 나는 긴장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역할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감사하다. 힘든 자식에게 부모라는 이름으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내고 있다.


삶이 막막하고 힘들 때면 쉬어야 다음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바로 그 역할이 베이스캠프 일 것이다.


부모라는 이름은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이다.


자식들의 삶을 바라보며 항상 안테나의 촉을 켜고 살아가는 게 부모인 듯하다. 생이 다할 때까지 말이다. 세상에 비빌 언덕이 부모라는 이름이 아닐까...


내 나이가 적은 나이는 아니다.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쉬어야 할 나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무료하게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내 삶이 소멸된다는 생각이다. 내가 힘없고, 인지 능력도 없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할 일이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그저 무력한 노인네일 뿐이다.


며칠 전 한길문고에서 한 작가 강연을 듣는 일이 있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보다는 잘하는 일을 하고 사는 게 맞다고 했다. 좋아하는 것은 살면서 가끔은 바뀌기도 한다. 잘하는 일은 성취가 쌓이고 칭찬도 받고 자기 만족도 느끼며 자신감을 얻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가끔이면 내가 잘하는 게 무얼까? 하고 나에게 물어보게 되지만 잘하는 것보다는 못하는 것이 더 많다.


잘하는 걸 찾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요구는 항상 내 마음 안에서 자리를 하고 나를 도전하는 길로 이끌고 있다. 많은 날들을 쉼 없이 갈고닦아야 내 것이 되는 일이다. 내 것이 만들어지고 난 후 느끼는 성취감은 나만이 느끼는 희열이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많은 장인들이 자기의 삶을 바치는 모습은 누구나 숭고하다,


나는 가끔이면 살아온 나의 삶을 뒤돌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은 영원한 것은 없다. 찰나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언제 이 지구별 여행을 마칠지 모르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지금껏 공부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 놓은, 기억의 보물 창고에서 꺼낼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무엇이 더 내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 주었나 생각하게 된다. 내 삶에 크게 아쉬움은 없다.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글을 쓰고 글 옆에 간단한 삽화를 그려 넣을 정도면 족 할 것 같다. 내 희망사항 중 한 가지이다. 캘리그래피를 배우고 글씨도 예쁘게 쓰고 싶다. 글 쓰기를 하고 자꾸만 연결되는 일들이 만들어진다. 반가운 일인지, 생각하면 의아스럽다. 욕심일까? 생각도 해보면서,


▲ 그림일기 남편이 성당에서 견진 받던 날, 우연찮게 받는 꽃다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차 마시는 일상이다


다행히도 시니어 일과 연관을 해서 김지연 동화 작가의 지도로 그림일기 모임을 하게 되었다. 나이 들어 젊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도 망설이면 후회할 것 같아 용기를 내어보았다..


딸 친구와 글 쓰기 에세이 반에서 같이 수업을 하고 작가 강연도 듣게 되니 새로운 일과 이어지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삶에 방향에 대해서도 새로운 길이 보인다. 혼자라면 도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글을 쓰면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시간들이 나에게 많은 정보를 주고, 좋은 길잡이가 된 듯해서 마음이 뿌듯하다.


마음속으로 염원하던 길을 찾아 조용히 혼자 시작했던 글쓰기다. 이 글쓰기가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준 행운의 기회였던 듯하다. 노년을 외롭지 않게 살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났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도록 해주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만났다. 하지만 때로는 외롭다.


내가 공부하고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나보다 젊은 사람들이다. 젊은 사람들은 알까? 젊은 사람들 속에서 나이 든 내가 마음이 쓰이고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다는 것을. 때로는 카톡 대화방에서 나누는 대화조차 내가 얼마큼 끼어들어 가야 하나 신경이 쓰인다. 그렇다고 없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기도 뭐하고,


사람은 때때로 군중 속에 외로움을 느낀다.


사람 사는 일이 나이가 들면 친구도 줄어든다. 그래서 실은 마음을 나눌 수 있고 내 삶을 이해하는 친구 몇 사람이면 그만이다. 나는 항상 호기심이 많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했다. 어떠한 선택을 하고, 자아의 길을 찾아가는 건 스스로의 몫인 것이다. 오늘도 나는 일기 쓰기 그림연습을 한다.


아직도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일이 잔뜩 쌓여 있어 잡념을 가질 시간이 없다. 나는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도전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살고 싶다.


새롭게 시작한 시니어 클럽에서 붓글씨를 쓰고, 이어서 그림일기를 쓰고, 삶의 생동감을 느낀다. 할 일이 많다는 것은 마음이 젊다는 것이다. 잡념을 가질 시간이 없어 좋다. 뭔가 집중은 두뇌 회전도 좋고 치매도 예방을 해 준다고 하니 일석 이조가 아닐는지, 언제나 긍정의 힘을 얻고 즐긴다. 삶이 훌쩍 흐른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처럼, 오늘도 난 내 인생에 무언가를 심는다. 아내의, 엄마의, 할머니의 것이 아닌, '나'라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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