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트러져 더 친근하고 맛있는 카이저슈마른(Kaiserschmarrn)
술을 엄청 즐기는 애주가는 아닙니다. 특별하게 즐기는 술도 딱히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맛있는 것을 늘 탐하는 저는 술 역시 맛있는 맛으로 접근합니다. 가령 어떤 음식을 먹을 때 이 술이 어울리겠다 싶으면 대부분 먹어봅니다. 얼큰한 알탕을 먹다가 요즘말로 빨뚜가 어울린다 싶으면 마셔야죠. 그러면 음식 맛도 몇 배로 배가 됩니다.
한국에서 우연히 맥주를 배울 기회가 있어 배운 이후로 집에서 맥주를 만들어 먹고는 했습니다. 그런 제가 독일에 오게 되었으니 얼마나 신이 났겠어요? 거의 매일 마트들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맥주들을 한 두 병씩 마시게 되었습니다.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그렇게 마셔도 또 새로운 것이 눈에 띄더라고요. 그것도 모자라 좀 알려진 양조장을 찾아 주말마다 쉼 없이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매년 10월 뮌헨에서 개최되는 옥토버페스트 방문은 정말 살면서 몇 안 되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옥토버페스트 일정에 맞춰서 한국에서도 유명한 Ayinge 맥주 양조장 방문을 계획했습니다. 왜냐면 아잉어 양조장은 옥토버페스트 기간에만 영어로 양조장 투어를 진행합니다. 그래서 일정에 꼭 넣었어요. 새벽부터 출발해서 약 460km를 운전해서 간 양조장은 너무 고즈넉했고. 전통이 살아있는 곳이었어요. 투어도 훌륭했지만 양조장에서 양조 중인 맥주를 바로 따라 마실 수도 있었고요. 여러 종류를 맛볼 수도 있었습니다.
투어가 끝나고 설명해 주신 분께 주변 점심식사 할 곳을 추천받았습니다. 물론 메뉴도요.
혹시 Ayinge 맥주의 라벨을 보신 분들이 계시다면 그 라벨의 모습이 딱 Ayinge의 모습입니다. 그런 곳에 위치한 비어가르텐에 자리를 잡고 추천받은 메뉴를 주문했어요.
사실 추천받은 메뉴가 카이저슈마른(Kaiserschmarrn)이었습니다. 딱 봐도 후식처럼 보이는데. 이것을 강력 추천하길래 좀 의아했지만 그래도 지역주민의 추천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독일 맥주들은 대부분 홉 향이 킥입니다. 특히 Ayinge 맥주도 거칠지 않은 홉 향이 맥주의 부드러움과 묵직함을 잡아줍니다. 여기에 카이저슈마른의 단맛은 정말 엄청난 맛의 시너지가 있었습니다. 투어 하면서 시음한 맥주에 더해 어찌나 맥주가 술술 들어가던지요.
카이저슈마른의 첫인상은 '이거 엄청 달겠는데?' 그리고 '양이 많아 포장해야겠다' 였지요. 웬걸요. 함께 주문한 슈니첼을 포장하고요 남편과 둘이 신나게 그 달달한 카이저슈마른을 순삭 했지 뭡니까. 500ml나 되는 맥주와 당 듬뿍 안주에. 와~ 지금 생각해도 꺽꺽거림이 느껴지네요. 그날 술도 깨고 소화도 시키고 출발하느라 꽤 오래 머물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정신줄 놓고 내일이 없는 듯 열심히 먹어치운 이 카이저슈마른은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바이에른 주에서 주로 즐기는 팬케이크입니다. 잘게 찢어진 반죽을 버터에 다시 굽듯이 볶고, 설탕을 살짝 넣어 표면을 캐러멜 화한 후에 마지막에 슈가 파우더를 뿌립니다. 여기에 사과소스나 과일 콤포트를 곁들입니다.
이 요리를 현지인들은 단순히 디저트로 보지 않는 것 같아요. 설탕을 줄이고 양을 넉넉히 해 점심 식사 대용으로 즐기기도 합니다. 비어가르텐 같은 레스토랑에서 짭짤한 학센이나 소시지를 먹은 뒤, 혹은 더운 여름날 시원한 맥주 한 잔에 곁들이는 안주 겸 입가심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달콤하고 폭신한 식감이 쌉싸름한 맥주와 의외의 '단짠' 조화를 이루거든요.
'카이저(Kaiser)'는 황제, '슈마른(Schmarrn)'은 엉망진창 또는 잡동사니를 뜻합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궁정 요리사가 황제를 위해 팬케이크를 만들다 너무 두껍게 굽는 바람에 모양이 망가져 버렸다고 합니다. 당황한 요리사는 이를 조각조각 찢어 설탕과 과일을 얹어 내놓았는데, 황제가 이 망가진 요리를 의외로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는 얘기죠.
그러고 보니 접시에 플레이팅 된 모습이 자칫 잡동사니 같아 보이기는 하네요. 망친 부침개 같은.
그 옛날 황제의 식탁에는 매일 멋지고 흐트러짐 없던 요리들만 올라왔을 겁니다. 그런 것들만 보다가 막 만든 것 같은 이 음식이 황제에게는 흥미로웠을 것도 같네요.
실제로 펜케이크를 굽다 보면 막상 이렇게 찢기도 어려워요. 달걀 스크램블도 익히면서 휘저어야 하는 타이밍을 기막히게 잘 잡아야 부드러운 스크램블이 되듯이, 펜케이크도 그래요. 어찌 보면 일부러 엉망으로 보이게 만들어 황제의 지루한 일상에 재미를 준 것은 아닐는지요?
정형화되어 있는 모습보다 좀 흐트러진 것을 마주할 때의 편안함이 있지 않나요?
제가 옥토버페스트에서 본 독일인들이 바로 이 카이저슈마른 같았습니다. 평소 마주치는 독일사람들은 죄다 표정도 별로 없고요. 반응이 뜨뜨 미지근하거든요. 저들이 화는 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고 있어요. 그런데요. 옥토버페스트에서 본 많은 독일인들은 대단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더라고요. 아침 10시부터 오픈하는 양조장 텐트마다 꽉 들어찬 인파들이 라이브 밴드의 음악에 맞춰 떼창하고 테이블에 올라가 흥을 돋우고. 큰 소리로 웃고 떠들고. 그렇게 생경한 수 없었어요. 이런 어머어마한 에너지를 평소 어디에 들 그렇게 꼭꼭 숨기고들 사는지... 정말 독일사람들의 다른 면을 봤어요.
살다 보니 더러 헝클어짐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팽팽한 긴장과 불안의 순간들을 지나고 있는 요즘이어요. 잠시나마 엉망처럼 보이는 카이저슈마른 한 접시와 둔켈맥주 한잔하면서 좀 릴랙스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