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해해야 주부 삶이 즐겁다.
고등학교 때 친구네 집에 놀러 갔던 일이 떠오르네요. 현관문을 열자 반질반질하게 닦인 마루 바닥이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바닥에 먼지라도 묻힐까 봐 뒤꿈치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답니다.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고 있는 사이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어요. 친구 엄마께서 차려 주셨던 음식들은 지금도 군침이 돌게 합니다.
나의 워너비 주부상은 친구 엄마였어요. 언제 누가 찾아와도 깔끔한 집, 한 상 뚝딱 차려지는 먹음직스러운 밥상
주부가 되어 살림을 직접 꾸려보니 친구 엄마처럼 말끔한 집안을 항상 유지하는 것도, 딸이 친구들을 갑자기 데리고 왔을 때도 당황하지 않고 한 상 뚝딱 차려낼 수 있는 능력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뱃속에 큰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 알게 된 언니가 있어요. 나이도 다르고, 성격도 달랐지만, 같은 해 출산 예정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기에 급속도로 친해졌어요. 하지만 아이들의 돌을 치르고 난 뒤에 언니와 나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답니다.
복직을 위해 덴마크 다이어트를 시작했다는 언니는 우리 집에 놀러 오면서 노른자를 제외한 삶을 달걀과 토마토를 지퍼팩에 담아서 왔더라고요.
그렇게 한 달 뒤 다시 만난 언니는 날씬해진 몸으로 뾰족구두를 신고, 공들여 화장을 하고 출근하는 워킹맘이 되어 있었어요. 아이는 시댁에 맡겼고요.
첫째를 임신하고 5살 터울로 둘째를 낳을 때까지는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러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여 사회로 진출하면서부터 고민은 시작되었습니다. 전업주부인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친구 엄마와 같은 살림에 우수한 능력을 뽐내는 살림 달인이 될 것인가? 임신했을 때 만난 언니처럼 날씬하고 당당한 워킹맘의 모습이 될 것인가?
어떤 날에는 열심히 살림에 매진합니다. 무릎을 꿇고 손걸레로 바닥을 박박 닦고, 냉장고 속 물건을 죄다 꺼내 바구니에 담아 가지런히 정리하고, 옷장에 옷을 꺼내 옷 가게에 진열된 옷처럼 개어 넣어 두고, 장 봐 온 재료를 손질해 저녁을 준비하는 겁니다.
어떤 날엔 보람도 있었지만, 살림에 매진하면 할수록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차피 내일이면 또 그대로일 텐데 싶어서 허무감이 밀려오기도 했고요.
그런 날에는 컴퓨터를 켜서 취업 알선 사이트에 접속했습니다. 결혼 전 하던 일에 대한 경력은 쓸모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는 나 같은 엄마가 원하는 시간 동안만 일 할 수 있는 직장은 바늘구멍보다도 작더라고요.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핑계가 많은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나다운 선택지를 찾게 되었어요. 살림 달인도, 워킹맘의 모습도 아니었어요. 살림을 나답게 하면서, 나의 성장을 위한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남들이 부러워하고 선망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천천히 나의 미래를 위해 시간을 쓰기로 결정했어요.
지독한 무기력에 시달리며, 아이가 등원한 시간에 소파에만 누워 있던 주부가 어떻게 실행하는 주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런 결정의 시작에는 책이 있었어요. 평소에 읽지 않았던 분야의 책들을 폭넓게 읽으면서 생각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다양한 모습, 삶에 대한 다양한 가치와 태도들을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몇 가지 안 되는 삶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아 갔어요.
책을 읽으며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도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MBTI, 컬러 DNA 검사, 갤럽 강점 검사, 버크만 커리어 검사, 사주까지. 이런 검사들을 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나'라는 사람은 단계별로 과업을 달성하면서 성장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스스로의 성장이 삶에서 중요한 가치인데, 살림은 끝이 없고, 성과를 측정할 수없고, 인정도 없었어요. 그런 이유로 살림을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무기력하고 우울해졌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자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듯 시원해짐을 느꼈어요. 나다운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힘이 들었던 거죠. 나다운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면 남들의 모습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 착각할 수 있거든요.
나다운 주부생활을 하면서, 나의 성장을 위한 일상으로 만들자.
이것이 내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나다운 주부생활은, 나의 장점을 살리는 거예요. 나를 이해하는 도구들을 통해 분류에 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물건을 정리 정돈할 때, 서랍에 바구니 사이즈가 딱 맞아떨어질 때 왜 희열을 느꼈는지 깨달았어요. 이처럼 나를 이해하면 나다운 살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다운 살림은 쓸데없이 낭비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줄여 줍니다. 내가 잘 못하는 걸 잘하려고 시간과 에너지를 과도하게 투입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잘 못하는 건 사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최소한만 지켜도 괜찮더라고요. 직무 유기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한 타협을 해야 나도 살고, 가족도 편안해지니까요.
이러한 살림을 시스템으로 만들어 간다면, 나다운 주부생활과 나의 성장을 위한 일상의 공존이 가능해집니다. 오전 1시간 안에 모든 살림을 마무리하고, 아이들이 없는 시간 동안은 마치 회사에 출근한 것처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SNS를 관리합니다. 차곡차곡 쌓인 기록들이 나의 성장과 커리어가 되어감을 느끼면서.
어떤 엄마는 청국장을 참 좋아한다고 해요. 그런데 가족들이 싫어해서 거의 10년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어요. 그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우리 집에 왔을 때 청국장을 끓여 대접했는데, 너무나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알았습니다.
이런 작은 것들도 잃어 가니 나다운 모습을 잃어 가는 것도 어쩜 당연하겠구나.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찾지 못하면 어느 순간 자신의 모습을 보며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요.
매일 해야 하는 주부의 일은 같을지 몰라도 그 일을 하는 각자의 모습은 다르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주부들이 자신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나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면 가능합니다!
저처럼 다양한 자기 이해 도구들을 활용해 보는 방법도 좋지만 지금 당장 해 볼 수 있는 쉬운 방법도 있어요.
빈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가 잘하는 것들, 남들이 나를 보고 잘한다고 말해주는 것들을 적어 보는 거예요. 이 시간을 통해 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요. 그리고 잊었던 나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어요.
무기력했던 주부에서 실행하는 주부가 된 비결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다운 모습을 찾아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살림을 나답게 이끌어 가면서 살림에 과도하게 들어가던 시간과 에너지를 줄여 나간 것, 줄여 나간 살림과 에너지를 나의 성장을 위한 시간으로 만들어 나가는 겁니다.
이런 내 변화가 다른 주부들에게도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나를 이해해야 주부로 지내는 지금의 삶이 즐겁기 때문이죠. 빈 종이를 꺼내 봅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적어 봐요. 그중 하나라도 조금씩 내 삶에 들여놓으면 어떨까요? 지금의 일상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활력이 생긴다면, 나다운 주부의 모습으로 살게 되고, 앞으로 실행하며 도전할 에너지도 생겨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