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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쓴다.

소년이 온다.

by 박수경 Dec 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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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며  즐거워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간 몸이 아파서 글 쓰는 일도 노동의 한 형태라

몸이 안 따라주니 아무런 글도 남길 수 없었다. 자신의 삶을 매일 기록하는 일은 사실을 남기기는 쉬어도 해석하고 그 생각을 다시 적는 건 자기를 부인하는 일 같다.

매번 일어나는 많은 일들 가운데 내 생각을 적는 일이

요즘 시절처럼 고달프긴 처음이다.


2024년도 10월 3일 10시 30분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발표하고

주변 지인들은 해제를 위해 국회로 갔다. 담을 넘어 계엄령이 해제되는 것을 지켜볼 때까지 그 새벽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들 학교를 보내야 할지 말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오래전 소년이 온다 한강 작가의 책을 읽고 팟캐스트를 통해 낭독과 소감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군사독재, 인간의 잔인성, 폭력,

그것이 다시 재현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비상계엄령이라는 단어가 주는

피냄새나는 이 시간들로 얼마든지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오기도 현실인가 싶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지금 이 시대도

겪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답답하고 숨 막혀서

잠을 못 이루겠더라,


출판의 자유까지도 억압받는 시대가 될 수 있다니!

어떻게 지켜낸 민주주의인데 싶어 답답하다.


그때 나누었던 내용이다. 오드리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https://podbbang.page.link/3KiXKK6Mn6s8rVpb6


문학을 읽는 엄마들에서 소년이 온다 한강 작가의 책으로 낭독하고 독서 나눔을 가졌습니다.!

5월에 마쳐 5.18일 날 공개하자고 했는데 각자의 사정으로 늦어졌네요. 하지만 완성된 녹음본을 보니 매우 뿌듯합니다.

소년이 온다 작품은 채식주의자로 한강작가가 문학의 권위를 인정받는 맨부커상을 받을 정도로 문학에 있어 세밀한 묘사와 더불어 마치 각자의 고백처럼 써 내려간 내용이 실화처럼 여겨질 만큼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인데요.

책 내용의 한 페이지만 읽어봐도 매우 생생하게 사진처럼 다가오는 내용이 많은 책입니다. 그 시절 광주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무고한 죽음과 무력하게 만드는 인간의 잔인함과 폭력이라는 끊어지지 않고 지속될 내재된 그 속성이 이 시대의 아픔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사람들의 고통의 깊이가 어떻게 지금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지 읽으면서 충분히 가늠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

낭독의 한 부분을 소개해드립니댜.

낭독 1 오드리) 어려서 외가에 가면, 네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허리가 기역 자로 구부러져 있던 외할머니는 따라오니라, 가만히 말하곤 앞장서서 걸어갔다. 광으로 쓰이는 어둑한 방으로 너는 따라 들어갔다. 외할머니가 찬장 문을 열 거란 걸, 제사 때 쓰려고 둔 유과와 강정을 꺼낼 거란 걸 너는 알고 있었다. 네가 유과를 받아 들고 히죽 웃으면 외할머니도 실눈으로 웃었다. 그 온화한 성품만큼이나 외할머니의 임종은 조용한 것이었다. 산소마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있던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새 같은 무언가가 문득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주검이 된 주름진 얼굴을 보며, 그 어린 새 같은 것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몰라 너는 멍하게 서 있었다.

 지금 상무관에 있는 사람들의 혼도 갑자기 새처럼 몸을 빠져나갔을까. 놀란 그 새들은 어디 있을까. 오래전 부활절 달걀을 먹으려고 친구들과 몰려간 성경학교에서 들은 것처럼, 천국이나 지옥 같은 이국적인 곳으로 날아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부러 무섭게 만든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흰옷을 입고 안갯속을 서성일 것 같지도 않았다.

 투둑, 빗방울이 네 상고머리로 떨어진다. 얼굴을 들자 뺨으로도, 이마로도 마구 떨어진다. 삽시간에 빗발이 되어 쏟아진다.

낭독 2 오드리) 스무 살 정미 누나도 키가 작다. 조금 짧다 싶은 단발머리여서 뒤에서 보면 여중생이나 초등학교 고학년생 같다. 앞에서 봐도 화장을 안 하면 고등학교 1학년 정도로 보인다. 그걸 자신도 아는지 늘 엷게 화장을 한다. 서서 하는 일이라 발이 부을 텐데, 출퇴근길엔 꼭 굽이 있는 구두를 신는다. 누군가를 때리기는커녕, 화 한번 시원하게 내본 적 없을 것처럼 걸음이 가볍고 목소리가 조용한 사람이다. 하지만 정대는 혀를 내두르며 너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래. 아버지보다도 누나가 훨씬 무서워.

 정대네가 사랑채에 세 들어 산지 이태가 되도록 너는 정미 누나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다. 그녀가 다니는 방직공장은 야근이 잦았다. 정대도 수금 때문에 귀가가 늦어지곤 해서-누나에겐 도서관에 다녀온다고 거짓말을 했다-첫겨울엔 자주 사랑채 연탄불이 꺼졌다. 어쩌다 동생보다 일찍 들어온 저녁이면 정미 누나는 부엌머리 네 방문을 가만히 두드렸다. 고단한 얼굴로 짧은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는 저어, 연탄불 좀...... 하고 어렵게 입을 떼었다. 그때마다 너는 점퍼도 안 걸치고 날쌔게 아궁이로 달려 나갔다. 불붙은 연탄을 골라 부지깽이째 건네주면 그녀는 고마워 어쩔 줄 몰랐다.

 처음으로 네가 정미 누나와 긴 이야기를 나눠본 건 작년 초겨울 저녁이었다. 정대는 책가방만 던져놓고 수금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너는 금세 알아들었다. 차갑고 부드러운 헝겊으로 겹겹이 감싼 것 같은 손끝으로, 뭔가를 겁내는 듯 조용히 두드리는 소리, 얼른 문을 열고 나간 너에게 그녀는 물었다.

 혹시 너, 1학년 교과서 다 버렸어?

 ....... 1학년 거요?

 되묻는 너에게 그녀는 십이월부터 야학에 다니게 됐다고 주섬주섬 말했다. 세상이 바뀌어서, 인제부턴 함부로 잔업을 못 시킨대. 월급도 오를 거래. 이 기회에 공부를 해보려고. 시간이 너무 지났으니까 1학년 거부터 먼저 흝어보고...... 정대 방학하면 2학년 거 보면 될 거 같은데.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너는 다락에 올라갔다. 먼지 묻은 교과서들과 참고서 몇 권을 안고 나오자 정미 누나의 눈이 커졌다.

 세상에...... 너는 사내아이가 어쩌면 이렇게 착실하냐. 우리 정대는 다 내버렸던데.

 책들을 안아 들며 그녀는 너에게 당부했다.

 정대한텐 말하지 마라. 안 그래도 저 때문에 내가 학교 못 다녔다고 눈치 보는데, 중학교 검정고시 합격할 때까지만 모르는 척해줘. 얼굴에서 무슨 풀꽃 같은 게 연달아 피어나는 것처럼 눈웃음을 짓는 그녀의 얼굴을 너는 멍하게 바라보았다.

 혹시 알아, 정대 대학 보낸 다음엔, 나도 열심히 해서 대학 갈 수 있을지.

 어떻게 몰래 공부를 하겠다는 건지 그때 너는 궁금했다. 저렇게 조그만 등으로, 참고서를 펼치면 가려지기나 할까, 두 평도 안 되는 단칸방에서, 정대도 일찍 자는 게 아니라 밤늦게까지 숙제를 하는데. 그렇게 잠깐 궁금했을 뿐인데, 그 후로 자꾸 떠올랐다. 잠든 정대릐 머리맡에서 네 교과서를 펼칠 통통한 손, 조그만 입술을 달싹여 외울 단어들, 세상에, 너는 사내아이가 어쩌면 이렇게 착실하냐...... 생글거리던 눈, 고단한 미소, 부드러운 천으로 겹겹이 손끝을 감싼 것 같은 노크 소리. 그것들이 가슴을 저며 너는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에 그녀가 걸어 나오는 기척, 펌프로 물을 길어 세수를 하는 소리가 들리면 너는 이불을 둘둘 말고 문 쪽으로 기어가, 잠에 취한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였다.


낭독 11 율찬솜)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놓았다.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 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네가 여섯 살, 일곱 살 묵었을 적에, 한시도 가만히 안 있을 적에, 느이 형들이 다 학교 가버리면 너는 심심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느이 아버지가 있는 가게까지 날마다 천변길로 걸어갔지.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지.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지. 숱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 가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지.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소년이 온다.

#한강

#문학을 읽는 엄마들

#창작과 비평




대통령 담화문을 읽고 답답한 심정이 되어 시 한 편을 적었다. 김남주 시인이 번역한 저항시 모음집이다.

문학이 하는 일이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폭력아래서도

존엄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돕는 일이 아닐까.

브런치 글 이미지 1

그중 하나의 작품을 적어본다.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문학은 철저하게 연구될 것이다

- 마르틴 아네르센 낵쇠에게  


- 브레히트

1

황금의자에 앉아서 글을 쓴 사람들은

다음 시대에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입고 있는 천을 짠 사람들은 누구였는가라고

그들의 저 작품은 철저하게 연구되겠지만 그것은

고상한 사상이 아니라 부록에 첨가된 문장이

관심을 가지고 읽혀질 것이다

그것이 옷감을 짰던 사람들의 특징을 추찰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왜냐하면 중요시되는 것은

찬탄의 대상인 저 선조들의 특징이기 때문에


일체의 문학

다듬고 다듬어진 그것으로부터도

철저하게 연구되어 파헤쳐내야 한다

압제의 시대에도 봉기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인간을 초월한 존재에 대한 기도가 있었다는 것은

인간 위에서 횡포를 부리는 인간이 있었다는 증거다

세련된 말의 음악은 전해 준다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다는 것을.


 2

그러나 다음 시대에는 찬양받을 것이다

맨땅 위에 앉아서 글을 썼던 사람들이

하층 사람들 사이에서 글을 쓰고

투쟁의 한가운데서 글을 썼던 사람들이

그들은 하층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하고

싸우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했다

기술을 구사하며 갈고 닦은 그 말은

예전에는 독점되어

전제군주에게 봉사했던 것이다


박해를 묘사했던 문장 또는 격문에는

하층 사람들의 엄지 손가락 자국이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야말로

그 문장을 손에서 손으로 건네고 이 사람들이야말로

그 문장을 땀에 젖은 속옷 밑에 숨기고

경찰의 비상경계령의 망을 빠져나와

동지들에게 전해줬기 때문에


그렇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이 현명한 사람들 우정에 넘치고 넘쳤던 사람들

분노와 희망으로

맨땅 위에 앉아서 글을 쓰고

하층의 투쟁하는 사람들과 어깨를 같이 했던 사람들이

찬양받을 것이다 공공연하게.


———————————————


삼다, 글쓰기 과제 이번주 책이다.

오래전에 책이 좋아 선물도 했던 책, 문학이 하는 일이

조용히 낮게 읊조리는 일, 분명히 힘이 있는데

글 잘 쓰는 사람들이 제발 분명한 어조로

이 모든 사건을 기록하면 좋겠다.

며칠전 한강 작가의 수상 소감문을 읽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금실로 이어진, 우리 삶이 참으로 애처롭고 절절하다.


어떤 역사의 기록은 남은 자들의 몫이고 평가는 그 이후

해석하는 자들에 의해 실제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왜곡되지 않고 진실이 그대로 밝혀지길 바란다.


한강작가의 수상 연설문을 기록으로 남겨둔다.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빛과 실>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제목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선 두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올라가는 여섯 단의 계단 모양 선 하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일곱 단의 계단 같은 선 하나. 그건 일종의 표지화였을까? 아니면 그저 낙서였을 뿐일까? 책자의 뒤쪽 표지에는 1979라는 연도와 내 이름이, 내지에는 모두 여덟 편의 시들이 표지 제목과 같은 연필 필적으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페이지의 하단마다에는 각기 다른 날짜들이 시간순으로 기입되어 있었다. 여덟 살 아이답게 천진하고 서툰 문장들 사이에서, 4월의 날짜가 적힌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의 두 행짜리 연들로 시작되는 시였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사십여 년의 시간을 단박에 건너, 그 책자를 만들던 오후의 기억이 떠오른 건 그 순간이었다. 볼펜 깍지를 끼운 몽당연필과 지우개 가루, 아버지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커다란 철제 스테이플러. 곧 서울로 이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그동안 자투리 종이들과 공책들과 문제집의 여백, 일기장 여기저기에 끄적여놓았던 시들을 추려 모아두고 싶었던 마음도 이어 생각났다. 그 ‘시집’을 다 만들고 나자 어째서인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졌던 마음도.


일기장들과 그 책자를 원래대로 구두 상자 안에 포개어 넣고 뚜껑을 덮기 전, 이 시가 적힌 면을 휴대폰으로 찍어두었다.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뛰는 가슴속 내 심장.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金) 실- 빛을 내는 실.


*


그 후 14년이 흘러 처음으로 시를, 그 이듬해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나는 ‘쓰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5년이 더 흐른 뒤에는 약 3년에 걸쳐 완성한 첫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시를 쓰는 일도, 단편소설을 쓰는 일도 좋아했지만-지금도 좋아한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에는 특별한 매혹이 있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1년, 길게는 7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 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 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나는 그 상태에서 다시 출발한다. 다음의 질문들이 사슬처럼, 또는 도미노처럼 포개어지고 이어지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게 된다.


세 번째 장편소설인 <채식주의자>를 쓰던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나는 그렇게 몇 개의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거부하고, 종내에는 스스로 식물이 되었다고 믿으며 물 외의 어떤 것도 먹으려 하지 않는 여주인공 영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안에 있다. 사실상 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혜와 인혜 자매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악몽과 부서짐의 순간들을 통과해 마침내 함께 있다. 이 소설의 세계 속에서 영혜가 끝까지 살아 있기를 바랐으므로 마지막 장면은 앰뷸런스 안이다. 타오르는 초록의 불꽃같은 나무들 사이로 구급차는 달리고, 깨어 있는 언니는 뚫어지게 창밖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이 소설 전체가 그렇게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응시하고 저항하며. 대답을 기다리며.


그다음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질문들에서 더 나아간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정체와 이탤릭체의 문장들이 충돌하며 흔들리는 미스터리 형식의 이 소설에서, 오랫동안 죽음의 그림자와 싸워왔던 여주인공은 친구의 돌연한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과 폭력으로부터 온 힘을 다해 배로 기어 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쓰며 나는 질문하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섯 번째 장편소설인 <희랍어 시간>은 그 질문에서 다시 더 나아간다.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말을 잃은 여자와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각자의 침묵과 어둠 속에서 고독하게 나아가다가 서로를 발견한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촉각적 순간들에 집중하고 싶었다. 침묵과 어둠 속에서, 손톱을 바싹 깎은 여자의 손이 남자의 손바닥에 몇 개의 단어를 쓰는 장면을 향해 이 소설은 느린 속력으로 전진한다. 영원처럼 부풀어 오르는 순간의 빛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연한 부분을 보여준다. 이 소설을 쓰며 나는 묻고 싶었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그 질문의 끝에서 나는 다음의 소설을 상상했다. <희랍어 시간>을 출간한 후 찾아온 2012년의 봄이었다.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침내 삶을, 세계를 끌어안는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 제목을 짓고 앞의 20페이지 정도까지 쓰다 멈춘 것은, 그 소설을 쓸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그 시점까지 나는 광주에 대해 쓰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1980년 1월 가족과 함께 광주를 떠난 뒤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이후 몇 해가 흘러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우연히 발견해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열두 살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저항하다 곤봉과 총검, 총격에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 있는, 당시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된 진실을 증거 하기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책이었다. 어렸던 나는 그 사진들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 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러니까 2012년 봄,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어느 날, 한 번도 풀린 적 없는 그 의문들을 내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오래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 후 1년 가까이 새로 쓸 소설에 대한 스케치를 하며, 1980년 5월 광주가 하나의 겹으로 들어가는 소설을 상상했다. 그러다 망월동 묘지에 찾아간 것은 같은 해 12월, 눈이 몹시 내리고 난 다음날 오후였다. 어두워질 무렵 심장에 손을 얹고 얼어붙은 묘지를 걸어 나오면서 생각했다. 광주가 하나의 겹이 되는 소설이 아니라, 정면으로 광주를 다루는 소설을 쓰겠다고. 9백여 명의 증언을 모은 책을 구해, 약 한 달에 걸쳐 매일 아홉 시간씩 읽어 완독 했다. 이후 광주뿐 아니라 국가폭력의 다른 사례들을 다룬 자료들을, 장소와 시간대를 넓혀 인간들이 전 세계에 걸쳐, 긴 역사에 걸쳐 반복해 온 학살들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그렇게 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 내가 떠올리곤 했던 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 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 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오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 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당연하게도 나는 그 망자들에게, 유족들과 생존자들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돌이킬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빌려드리는 것뿐이었다. 소설의 처음과 끝에 촛불을 밝히고 싶었기에, 당시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곳이었던 상무관에서 첫 장면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열다섯 살의 소년 동호가 시신들 위로 흰 천을 덮고 촛불을 밝힌다. 파르스름한 심장 같은 불꽃의 중심을 응시한다.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


그렇게 <소년이 온다>를 완성해 마침내 출간한 2014년 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다고 고백해 온 고통이었다. 내가 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고통과,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느꼈다고 말하는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같은 해 유월에 꿈을 꾸었다. 성근 눈이 내리는 벌판을 걷는 꿈이었다. 벌판 가득 수천수만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고, 하나하나의 나무 뒤쪽마다 무덤의 봉분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 아래에 물이 밟혀 뒤를 돌아보자,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에서부터 바다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왜 이런 곳에다 이 무덤들을 썼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래쪽 무덤들의 뼈들은 모두 쓸려가 버린 것 아닐까. 위쪽 무덤들의 뼈들이라도 옮겨야 하는 것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지금.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나에게는 삽도 없는데. 벌써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는데. 꿈에서 깨어나 아직 어두운 창문을 보면서, 이 꿈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꿈을 기록한 뒤에는 이것이 다음 소설의 시작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어떤 소설일지 아직 알지 못한 채 그 꿈에서 뻗어나갈 법한 몇 개의 이야기를 앞머리만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2017년 12월부터 2년여 동안 제주도에 월세방을 얻어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바람과 빛과 눈비가 매 순간 강렬한 제주의 날씨를 느끼며 숲과 바닷가와 마을길을 걷는 동안 소설의 윤곽이 차츰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들을 읽고 자료를 공부하며,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잔혹한 세부들을 응시하며 최대한 절제하여 써간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것은, 검은 나무들과 밀려오는 바다의 꿈을 꾼 아침으로부터 약 7년이 지났을 때였다.


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했던 몇 권의 공책들에 나는 이런 메모를 했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바람과 해류. 전 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이 소설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의 여정이 화자인 경하가 서울에서부터 제주 중산간에 있는 인선의 집까지 한 마리 새를 구하기 위해 폭설을 뚫고 가는 횡의 길이라면, 2부는 그녀와 인선이 함께 인간의 밤 아래로-1948년 겨울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의 시간으로-, 심해 아래로 내려가는 수직의 길이다. 마지막 3부에서 두 사람이 그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밝힌다.


친구인 경하와 인선이 촛불을 넘겼다가 다시 건네받듯 함께 끌고 가는 소설이지만,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진짜 주인공은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사람. 애도를 종결하지 않는 사람.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 평생에 걸쳐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와 온도로 끓고 있던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묻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 3년이 흐른 지금, 아직 나는 다음의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 책을 완성한 다음에 쓸 다른 소설도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내 삶을 잠시 빌려주려 했던, 무엇으로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흰>과 형식적으로 연결되는 소설이다. 완성의 시점들을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이다. 지금까지 쓴 책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어느 사이 모퉁이를 돌아 더 이상 과거의 책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내가 그렇게 멀리 가는 동안, 비록 내가 썼으나 독자적인 생명을 지니게 된 나의 책들도 자신들의 운명에 따라 여행을 할 것이다. 차창 밖으로 초록의 불꽃들이 타오르는 앰뷸런스 안에서 영원히 함께 있게 된 두 자매도. 어둠과 침묵 속에서 남자의 손바닥에 글씨를 쓰고 있는, 곧 언어를 되찾게 될 여자의 손가락도.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내 언니와, 끝까지 그 아기에게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말했던 내 젊은 어머니도. 내 감은 눈꺼풀들 속에 진한 오렌지빛으로 고이던,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으로 나를 에워싸던 그 혼들은 얼마나 멀리 가게 될까? 학살이 벌어진 모든 장소에서, 압도적인 폭력이 쓸고 지나간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밝혀지는, 작별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사람들의 촛불은 어디까지 여행하게 될까? 심지에서 심지로, 심장에서 심장으로 이어지는 금(金) 실을 타고?


*


지난해 1월 낡은 구두 상자에서 찾아낸 중철 제본에서, 1979년 4월의 나는 두 개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사랑은 무얼까?


한편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나는 줄곧 다음의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내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첫 장편소설부터 최근의 장편소설까지 내 질문들의 국면은 계속해서 변하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이 질문들만은 변하지 않은 일관된 것이었다고. 그러나 이삼 년 전부터 그 생각을 의심하게 되었다. 정말 나는 2014년 봄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난 뒤에야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우리를 연결하는 고통에 대해- 질문했던 것일까?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은 ‘나의 심장’이라는 개인적인 장소에 위치한다고 1979년 4월의 아이는 썼다.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 그 사랑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 주었고, 연결되어 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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