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 연결될 때 문장은 단단해진다.
타인과 연결될 때 문장은 단단해진다
기록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건 스물일곱
우연히 시작한 블로그였다.
2007년에 시작한 블로그는 많은 분들의 소통과
교류로 서로를 오가며 답글을 남기고 좋아요
하트를 누르고, 그 언저리에 시작된 책과 콩나무
라는 서평을 쓰는 카페에서 신간 책을 받기도
예스 24라는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받고 서평을
남기기도 했다. 책을 서평의 대가로 받는 것을
해보면서 이십 대에 내가 구매하지 않고 서평을 잘
써 주는 이유로 받으려니 감상이 되질 않았다.
관찰도 되지 않았다. 좋은 점만 고르려고 해 보니
오히려 문제만 보였다. 문제를 잘 포용하고 적으려니
이상한 문장들로 포장이 되었다. 마치 겉만
화려한 과대 포장지처럼 말이다.
아마도 그때부터 내가 읽을 책은 내가 산다로
바뀐 것 같다. 그 뒤로 책은 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다 라는 유명한 글귀처럼
책을 사 모으기 시작한 거 같다.
비록 여섯째를 낳으면서 집을 정리하고
이사를 위해
알라딘에 모두 팔기도
지인들께 나누기도 했다. 그때 버린 책들이
가끔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기도 한다.
내가 읽었던 모든 문장들이 결국 내 삶을 이어주는
실타래가 되어 잘 짜인 옷이 되었다.
기록하지 못한 문장들도 제목과 작가의 이름으로
내 마음속에 하늘에 별처럼 떠 있다.
20권을 일괄 5만 원에 판매했던 일종의 책에 대한
책인감으로 떠 넘기고 분양했던 책의 기억들을
오늘, 아침 브런치에 소환해 본다.
참, 나라는 사람 문학을 지독하게도 좋아한다.
책을 보내고 정적이 감도는 집을 얻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거실에서 그동안 내 곁에 10년 때로는 20년 가까이 있었던 책들이
유령처럼 빈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무엇이 있었던 자리가 빠져나간 공간을 알아차리는
사람도 있을까, 그건 쉽지 않다.
나를 빼곡히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만이 나에 부분 부분을 눈치채는 것처럼
텅 빈 듯 텅 비어 있지 않은 나의 집을 보면서
내가 작정하고 비운 공간에서 지난 책들을
추억해 본다.
그동안, 적어 두었던 문장들을 모아서 펼쳐놓으니
비어 있는 집이 문장들로 가득 차서 집을 비웠지만
비운 것 같지 않다.
그동안 적어 두고 아껴 둔 소중한 문장들을
이곳에 고이 간직한다. 마음껏 글을 쓰기 위한
도구가 되기를 바란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글과 말은 이미 산 사람들에게서 받은 영감이며 삶의 길에서 얻은 누군가의 것이다.
우리의 모든 자원은 이미 있는것을 취한 결과이고 그것을 엮는 수고를 감당할 뿐인 것 같다.
^^ 글을 쓰는 일이 무엇일까?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었을까 찬찬히 기억하고 생각해 보니
엄마는 오늘도 소금땅에 씨 뿌리러 간다.
최유진 작가님 책에서 건져올렸던 문장이다.
우리의 많은 소유 중 고통이 가장 큰 것이었다면, 그걸로 다리를 지어 또 다른 고통받는 이에게 건너갔어 야 하는 것을..
우리의 연민이 자기 연민에만, 머무른다면, 숱한 나날 을 고통 속에서 산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p.183
엄마는 오늘도 소금땅에 물 뿌리러 간다 최유진
나의 고통의 근원을 알고.싶어 읽기 시작하고 그 이후로 기록하며 쓴 글들이 아마도 또.다른 고통받는 이들의 잠시의 쉼이 되기를 내 글을 통해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내 글이 아니 지금껏 나를 다독여주던 문장들이
구원이 되길 바라본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 어마어마해요. 돌로 만들었죠. 때로는 대리석으로도요, 그 옛날에는 대성당들을 지으면서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었던 거죠. 그 옛날에는 모두의 삶에서 하느님이 중요한 일부분이었습니다. 대성당을 지어 놓은 걸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말했다. "이 정도로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설명이겠습니다. 이런 일은 잘 못하겠습니다."
레이먼드카바 대성당
어떻게든 나는 내 작은 피로를 인류의 큰 피로와 연결해야 한다. 인류는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지고 피곤하게 살고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인생의 짐으로 피곤한 자들아, 내게 오라. 와서 내 짐(온 세상의 짐)을 지라, 가벼운 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 짐을 없애 줄 것이다.”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짐을 지라”라고 말씀하신다. 그 짐이 내게 큰 감동을 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짐이란 무엇인가? 내가 피곤한 것은 단순히 내 일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어서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짐을 덜어 주고자 내가 분에 넘치는 짐을 지고 있어서인가?
안식의 여정 헨리 나우웬
P.38~39
여성의 일상적인 삶에는 조리한 음식은 먹으면 사라지고 공들여 키운 아이들은 곧 세상 밖으로 나가버린다.
서풍이여 그대는 언제 불어 오려는지
약간의 비라도 내릴 수 있도록
그리스도여, 당신의 사랑이
내 품 안에 있고
나는 다시 잠자리에 들 수 있다면!."
책 읽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고통과 슬픔을 겪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반직관적인 길이 무엇인지 배웠다.
약함이라는 길을 통해 가장 큰 강함이, 방황이라는 길을 통해 가장 높은 지혜가, 슬픔이라는 길을 통해 가장 짙은 기쁨이, 의심이라는 길을 통해 가장 깊은 예배가 나온다.
아름다운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사랑은 시처럼 온다. 신현림
P.57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핵심이 권고일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모호하고 막연한 기분이 아닙니다. 강력한 선포입니다. 복음은 나랏일을 맡은 사람이 알리는 포고 사항 또는 라디오나 다른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발표와 같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접근하는 바른 방식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식으로 복음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복음을 받고도 마귀의 부추김에 넘어가 자기 철학 안에 있는 다른 것으로 왜곡시킵니다. 그것은 이 선포를 부정하는 것이다
P.60~61
복음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행하라는 촉구가 아닙니다. 복음의 모조품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성탄절의 전체 메시지가 우리에게 이렇게 호소한다는 듯 말이지요. “그럼 이제, 이 시기 동안 최선의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이 시기를 잘 활용합시다. 함께 궁리하고 함께 행동하고 전쟁을 없애고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합시다.” 복음이 정치성이 짙은 그 무엇인 것처럼, 우리가 하게 될 어떤 일, 우리가 드러내고 실천에 옮겨야 할 어떤 정신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관한 선언입니다.
#마틴로이드존스의 내 구주예수
#두란노
"기도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더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에, 기도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이미 받은 은혜를 점점 더 깊이 헤아리게 된다. "
page 46. 기도하는 즐거움. 마이클 리브스. 이레서원
page 337. 로마서에 반하다.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 사랑에 바치라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깨닫고 누리는 방식이다. 즉 그 명령은 우리가 우리의 전부를 걸고 사랑하지 않으면 아들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고 타인에게 베풀지도 못하기 때문에 주어졌다."
박홍섭, 세움 북스
"어떻게 지난 사십 년, 혹은 오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이 강가를 찾지 않았을까, 아니 왔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토록 관심이 없었을까. 야코프는 도무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시한 강도 아니고 딱 좋은 강인데 말이다. 이 강에서 물고기를 잡았더라면 상인이나 관리, 역에 있는 식당 주인들에게 팔 수도 있었고, 그렇게 번 돈을 은행에 예금할 수도 있었다. 또 배를 타고 강변의 별장들을 이리저리 오가며 바이올린을 연주했더라면 관직에 있는 나리들이 돈을 주었을 것이다. 사라진 짐배를 다시 운영할 수도 있었다. 그게 관 짜는 일보다는 벌이가 훨씬 나았을 게다. 그뿐인가, 거위를 키운 후 잡아서 겨울마다 모스크바로 보낼 수도 있었다. 거위 털만으로도 일 년에 십 루블은 너끈히 벌었을 텐데. 그런데 하품만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큰 손해였냐. 얼마나 큰 손해였느냐 말이다. "
page.29
#롯실드의 바이올린
성경이 우리가 '행위로 말미암아'
(롬 3장 28절;갈 2:16) 의롭게 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행한 것이나 현재 하고 있는 일 그리고 앞으로 행할 모든 일들은'의롭다'라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판결에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신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순종의 행위만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로 인하여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칭의가 오직 그리스도의 행위에만 기초해 있기 때문에 우리 행위들은 칭의의 토대에서 완전히 제외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칭의에 있어서 그만의 매우 독특한 역할을 지닙니다 믿음은 받아들임입니다.
믿음이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행위와 합쳐진 어떤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Justification -칭의란 무엇인가
page 47
"바보 같고 어색한 모습이라니. 분명히 말할게, 패니. 어휘를 매우 부적절하게 사용한다는 점만 빼면
너한테 그런 구석은 전혀 없어. 너를 아는 사람들이 널 소중히 여기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넌 훌륭한 분별력과 상냥한 마음씨를 가진 아이야.
그리고 난 네게 친절한 대접을 받으면 보답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보은의 감정이 있다고 확신해.
말벗이나 동거인으로 이런 심성보다 더 나은 자격이
있나 모르겠다."
page.47 맨스필드파크
나의 하나님, 당신이 무언가를 주시기 전까지는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심지어 기도를 할 때도 당신이 우리 안에서 기도를 하셔야 기도가 됩니다. 저는 아름다운 기도를 쓰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자원이 제게는 없습니다. 당신을 찬양하는 말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주변에 가득 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바닥에 칠하는 왁스나 비둘기 알 같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을 그런 시시한 순간들에 제 무의식에서는 아름다운 기도문이 떠올라 무언가 고양된 것을 적기도 합니다. 제가 철학자라면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 제가 저 자신을 전부 다 안다면, 그래서 제 안에 있는 현학적 자기 중심성, 조금이라도 가식적인 것을 전부 찾아낼 수 있다면, 그때 저는 무엇이 될까요? 하지만 어떤 때는 두려움이었다가 어떤 때는 즐거움이었다가 하는 제 이해가 도달하기에는 너무 깊이 깔려 있는 그 감정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 주님, 제 영혼의 어둠을 더듬어 찾으려는 그 은밀한 손이 저는 두렵습니다. 그것들로부터 저를 지켜 주십시오. 그 깊은 곳으로 가는 통로의 입구를 덮는 덮개가 되어 주십시오. 오, 하나님 제가 게을러서 오히려 신앙을 버리지 않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런 생각은 생각만 할 줄 아는 사람에게나 통하겠지요.
page 25
플래너리오코노의 기도 일기 ivp 양혜원 옮김
"목회자였고, 좋았고, 대가족이었습니다. 내가 자연세계에 대해 왜 그렇게 친근감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나는 그 첫 번째 중요한 연결고리, 그 첫 번째 경험들이 사회 세계보다는 자연 세계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을 느꼈다.
비.
오후 내 비 내리더니
구름 속
노란 빛줄기 타고 내려온 놀라운 힘,
신의 권능이 그런 것이겠지.
그 힘이 나무에 닿자, 나무의 몸
영원히 열렸지..
p.21
기적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진하고 뜨거운 거듭남으로 빚어지지.
부드러움이나 갈망이 아닌, 대담함,
얼어붙은 폭포를 깨부수는 힘, 돌파.
양치식물, 잎들, 꽃들, 그 우아하고 평화로운
마지막 정교한 장식은,
일어나 번성하기를 기다리고 있지.
길을 여는 건 꼭 예쁠 필요는 없어.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세 가지를
할 수 있어야만 하지.
유한한 생명을 사랑하기.
자신의 삶이 그것에 달려 있음을
알고 그걸 끌어안기.
그리고 놓아줄 때가 되면
놓아주기.
기러기 page 226~227, 메리 올리버
"사람마다 인생의 절정으로 기억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이 순간을 준비하기 위해 내 인생에 그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싶은 때 말이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길리아드가 있을 것이다. 남이 볼 때는 그것이 시시해 보이고 좁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존 에임스 목사처럼 알만한 것은 다 알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자리라는 확신으로 그 자리를 지킨다면,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귀한 일일 것이다.
<나의 길리아드, 나의 분깃>
page. 356
#악마의 눈이 보여주는 것
#문학질문하며 함께 읽기
#홍종락
두려움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나는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또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밑바닥에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고, 사람을 어려워하는 마음 밑바닥에는 투명한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두려움은 나를 넘어뜨리지만 나는 일어나는 법을 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애쓰지 않는 것,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어찌하려고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내가 두려워하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는 것, 두려움을 마주하며 알게 된 방법이다. 앞으로 어떤 두려움이 찾아올지 모르지만, 씩씩하게 뛰어들고 싶다. 그래야 두려움에 가려 있던
'내가 사랑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고 그것이 주는 기쁨을 듬뿍 누릴 수 있을 테니까.
흉터가 돼라. 어떤 것을 살아낸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네이이라 와히드-
흉터가 많은 사람은 열심히 정성껏 살아낸 사람이며, 그는 자신의 흉터를 이야기함으로써 비슷한 상처를 지닌 사람에게 따뜻한 힘을 줄 수 있다.
page.103-104
"두려움이 어둡고 서늘한 기운으로 나를 덮칠 때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모은다.
그럼 삶이 전보다 소중해진다.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 아래 서야 하듯이, 예배에 필요한 태도와 행동에서도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조종하거나 자기 과시를 하려 하거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기 계시를 기대하며 기다린다. 우리는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경험 속으로 들어간다. 예배 순서는 예배가 아니다. 이것은 예배가 이루어지게 하는 공간과 시간을 조성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계속해서 주체로 남아 있으면(우리의 예배 행위에 초점을 맞춘 채) 진정한 예배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각과 예배의 차이는, 예배에서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다는 것이다. 전례나 말씀이나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이 침노하신다.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 앞에 엎드리며 그분의 계시를 기다릴 때, 우리는 그분 자신을 내어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을 받은 최고의 신비에 빠져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우리 자신의 행적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분의 성품에 초점을 맞추고 그분의 성품을 묵상하게 된다.
향연 page 188
안식 마르바 던 IVP
#에스겔강해
#마틴로이드존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p.263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가 너희 지체를 희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그때부터 소출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오, 성도와 죄인은 얼마나 대조되는지요!
성도가 얻는 소출이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지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니”
이 얼마나 놀라운 소출입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은 생명과 사랑-고상한 모든 특질-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발현되는지 보여줍니다. 앞서 묘사한 죄인의 죽음과 성도의 죽음을 비교해 보십시오. 확연히 다릅니다! 오, 의의 소출이여! 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의 만족이여! 오, 괴로울 때 얻는 위로여! 오, 곤궁할 때 받는 위안이여! 오 죽음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영원한 세계여! 상황이 어떠하든 소출이 나옵니다. 의지할 것이 있고, 먹을 양식이 있으며, 영혼을 지탱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에서는 이런 소출이 나옵니다.
무엇보다 경이로운 사실은 이 소출이 계속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땅을 경작할수록 소출이 늘어납니다. 이제는 자기 스스로 속에 있는 것을 촉진시켜 끌어냅니다. 죄의 삶을 살 때와 달리 그것들을 소진시키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이끌어 냅니다.
시펴 92:14을 보십시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열매가 계속 맺힙니다. 주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갑니다. 사도바울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그 과정 중에 있으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것입니다. (엡 4:13) 계속 성장할 것입니다 해마다 소출이 늘고 많아질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계속 이렇게 성장하다가 마침내 하나님 앞에 이르러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신성한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 에스겔강해 page. 263
"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
".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모든 것으로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게 하신다. "
page 230 성도와 하나님의 교제, 존오웬,
생명의 말씀사.
성경의 하나님은 끊임없이 활동하시며 인간의 상황에 반응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의 비참함이나 기쁨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하여 그러한 감정들로부터 초월해 있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성경 전체가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며 슬퍼하시는 동시에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의 비참함을 바꾸기 위해 효과적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모습을 당신의 백성들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며 그들을 돌보시고 그들의 행복을 바라시는 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중략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불변성에 있어서 정적이지 않으시고, 역동적이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역동적인 불변성이 하나님 되심을 훼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분이 만일 무엇인가 의도하거나 행동하는 일을 하지 않으셨다면, 더 이상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선언하듯이,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영원한 계획에 맞게 의지를 갖고 행동하십니다.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 제 견해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는 벌코프의 주장이 맞습니다.
... 그분께서 말씀하신 행동의 원칙은
언제나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선언하신 행동의 원칙대로 반응하셨던 것입니다.}
page 105,111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기도
p. 145
실상 하나님의 영원하신 마음속에 지금도 별처럼 반짝이며 그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약속을 지키면 시간 속에 영원을 맛보다가, 장차 그 나라에서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이 비밀이 담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기도는 오늘만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가는 날에도 울려 퍼질 것입니다.
나의 영혼을 그대로 보면 그것은 무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가장 진실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크게 보시는 사람이 어떻게 전혀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을지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어떻게 무가 될 수 있을지요? 하나님, 당신은 참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없는 것을 부르시므로 그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을 부르셨기에 그들은 있습니다. 그들 자신만으로는 없으나 당신이 함께 계셔 주시기에 그들은 있습니다. 우리는 더 높은 망대에 올라 하나님의 도성을 찾고, 그의 성전을 찾으며, 그의 집을 찾고, 그의 신부를 찾도록 합시다.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 두려움과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는 말합니다. 우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존귀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이에서, 송용원
뒤라스의 말 p.198
뒤라스
여긴 40년 동안 딱 한 번 바뀌었어요. 이제 줄곧 이 상태가 아닐까 싶어요.
집은 우리가 안심하러 들어가는 집합소인 동시에, 그곳의 거주자들에게 필연적으로, 또 위험하게 영향을 받는 곳이죠. 집은 일종의 자궁의 연장선처럼 여성에게 속해요. 남성은 공간을 이용하는 데 그치죠....
내게 집이란 늘 바깥공기가 흐르는, 열린 장소였어요.
글을 쓸 때 필요한 건 요컨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느끼는 거예요."
마음산책,뒤라스의말
"이는 꼭 당신이 하나님을 찾고 있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당신의 영혼이라는 동굴 속으로 탐험을 떠날 때 당신은 거기서 만나는 사람을 보고 놀랄지도 모른다. "
p.169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떠나는 여정> 제임스 K.A. 스미스, 비아토르
“아버지여, 그대의 사랑이 지닌 순수함과 강렬함이
(내 백성의 순수함과 강렬함이)
내 백성의 순수함과 강렬함이 되어 그들이 그 사랑으로 나의 영광을 보고 고귀하게 여기며 만족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 26절
P.203
섭리. 존파이퍼
사진은 '가까이 머무는 시간'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p.65
당신 곁에 있습니다. 임종진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 어휘까지가 나의 세계다. 자신의 언어세계가 궁색하기에 그는 타인의 세계를 감히 상상하지 못했고, 따라서 타인의 아픔이나 슬픔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거다
p.31
상상력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역지사지의 자세다. 그런 상상력 결핍이 최선을 다해 아주 성실히 유대인을 죽이는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어떤 죄책감이나 후회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p.33
곤고한 날에 생각하라 김기현
"더 주어도 괜찮지만, 매번 주고 싶은 만큼보다 덜 주는 것이 내 식의 배려였다."
시와 산책, 한정원 p.52
'인간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적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잊고 살다가 갑자기 기억이 떠올랐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그리스도교는 사람을 높은 곳으로 데려간다. 그곳에서는 이성의 법칙을 따르는 기쁨의 세계가 열린다.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아는 사람이 경험하는 감정은 캄캄하고 답답한 탑 속에 갇힌 사람이 탑 위 탁 트인 높은 곳으로 올라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세계를 보았을 때 느끼는 기분과 비슷하다.
1월 p.81 인생독본 톨스토이 1,2권
"그들이 처한 위험을 깊이 느낀다면 경건치 않은 자들이 자신의 죄속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계속해서 그들의 문을 두드리십시오. 생사를 위해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십시오. 그들을 향한 여러분의 뜨거운 갈망과 간절함, 해산의 수고를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공감 속으로 인도받기 위해서는 영혼을 위한 우리의 고뇌가 반드시 진실해야 합니다. 낮은 경건함은 낮은 영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p.85 오래된 복음주의
이안머레이
" 하나님의 평화는 우선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용서와 용납이라는 새로운 관계다. 그리고 그 평화의 원천은 화목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날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너희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다."(요 20:19-20)
왜 그렇게 하셨는가?
단지 예수님의 신분을 확실히 밝히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화목을 위해 죽은 것,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와의 평화를 이룬 그 죽음을 상기시켜 주시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그들 대신. 그들을 대표하여, 그들을 위해 평화를 이루기 위해 고난 받으셨고, 이제 그 평화를 그들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부활의 권능으로 오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p.309 복음의 핵심.
p.54~55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과거에는 죄가 어떻게 극복되었으며, 지금은 어떻게 극복되고 있고 앞으로는 어떻게 극복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성경은, 인류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과거에는 어떻게 구속받고 회복되었으며, 현재는 어떻게 구속받고 회복되고 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구속받고 회복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님이 땅을 사랑하고 다스리고 돌보도록 만드신 피조물들은 구속을 받게 될 것이다. 구속은
다시 되돌리는 것,
다시 사는 것,
회복시키는 것
을 의미한다. 성경은 이 메시지를 계시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천국만이 내 집은 아닙니다. 폴 마샬
완전히 녹초가 됐다. 단 하나의 단어도 퍼 올릴 수 없다. 그러나 저 우물 밑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니까 하루 이틀 기다려서. 우물에 물이 고이게 하자. 이번에는 터무니없이. 깊을 것이다.
중략,
아, 누군가가 뇌에 대해 뭔가 좀 아는 것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오늘도 절망 속에 거의 눈물에 젖어 아무것도 보탤 수 없는 이 장을 바라보면서, 실타래를 더듬어 실 자락을 찾을 수 있다면..
p.423
울프일기, 1935년 53세 9월 5일 자 내용이다.
오로지 연결하라. -E. M. 포스터-
타인의 관점과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깊이 읽기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혜택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프루스트는 읽기의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친밀한 감정을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개인적인 세계에서 미동도 안은 채 타인과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타인의 삶에 들어가기, 옮겨가기
p. 79 다시 책으로, 메리언울프지음, 어크로스
우리의 많은 소유 중 고통이 가장 큰 것이었다면,
그걸로 다리를 지어 또 다른 고통받는 이에게 건너갔어야 하는 것을..
우리의 연민이 자기 연민에만, 머무른다면, 숱한 나날을 고통 속에서 산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p.183
엄마는 오늘도 소금땅에 물 뿌리러 간다 최유진
'아, 내게는 점점 더 사람이 모든 것의 근원으로
보인다.'
p.22
반고흐가그린사람들, 바느질하는 여인
우리에게 숨을, 성령을, 생기를 주소서
돈이 필요할 때마다 기도한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길 기도한다. 걸으며, 운전하며, 아쉬울 때마다 성령을 구하며 기도하지만, 분명 돈을 청구하는 것이다.
잔고가 줄어 불안해도 쪼잔하게 돈 달라고 기도하진 않겠다.
짙은 한숨이 뱃속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온다. 과연
성령은 '숨'이다.
p.135 복음과 상황 4월호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내 인생의 한 구절 편
소설을 통한 푸르스트의 시간 실천은 조급성의 시대라고 불린 당대. 예술조차 '짧은 줄에 바짝 묶여 있던." 시간에 대한 반응이었다.
구원의 순간은 "결연한 시선." 지금 여기에서 결단을
내린 현존재의 시선이다. p.132
#시간의 향기 #한병철
'언니, 내가 언니에게 관대하지 못했던 것을 용서해요. 그렇게 사랑하고 싶었으면서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거, 편지들에 답하지 않았던 거 미안해. 아주 오래 보고 싶었어요. 잘 지내요.'
p.82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p.52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몫
최은영
<생각과 정신>
'행동' 하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몰라야 하는지! p.173
폴발레리의 문장들
p.222
손봉호 교수는 그의 책 『고통받는 인간』에서 데카르트가 했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go sum'라 는 말을 "나는 아파한다. 고로 존재한다 Doleo cgo sum"로 바꾸어 인간의 실존을 고통받는 인간으로 묘사한다.
죽음사회너머, 김성민
P.11~12
예술 작품에 관해 쓰는 일은 작품 이전에 존재하던 것들에 닿으려고 애쓰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가가 전하는 언어는 작품의 얼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드리운 그림자에도 있다. 때로는 얼굴의 표정보다 그림자의 명암이 더 진하다.
드문 여름날이었다. 낮에는 예고도 없이 큰 비가 내려 갑자기 우산을 샀다. 비가 그치고 서늘한 회색 공기가 가 라앉았다. 아무래도 한여름이라고 볼 수 없는 날씨였다.
#등을 쓰다듬는 사람
#1984 books
#김지연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을 수 있는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위입니다. 무엇이든 사랑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분명 아픔을 느낄 것이며, 어쩌면 부서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아무 손상 없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다면, 누구에게도
•••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 모든 얽히는 관계를 피하십시오. 마음을 당신의 이기심이라는 작은 상자에만 넣어 안전하게 잠가 두십시오. 그러나 ••· 그 상자 안에서도 그것은 변하고 말 것입니다. 부서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깨뜨릴 수 없고 뚫고 들어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p.40
CS루이스의 인생책방
홍종락
P.209
고통에 대한 언어는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처절한 자각으로부터 나온다. 말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분할하게 된다.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도 말할 수 있게 된다. 언어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표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앞에서 침묵하게 하고 그가 당한 고통의 절대성에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게 한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엄기호
Page 115. 아무리 탐탁지 않고 불편하더라도 모든 일은 같이 알고 행해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머스그로브 가의 오래된 관습이었던 것이다.
설득. 제인오스틴
"어떻게 지난 사십 년, 혹은 오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이 강가를 찾지 않았을까, 아니 왔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토록 관심이 없었을까. 야코프는 도무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시한 강도 아니고 딱 좋은 강인데 말이다. 이 강에서 물고기를 잡았더라면 상인이나 관리, 역에 있는 식당 주인들에게 팔 수도 있었고, 그렇게 번 돈을 은행에 예금할 수도 있었다. 또 배를 타고 강변의 별장들을 이리저리 오가며 바이올린을 연주했더라면 관직에 있는 나리들이 돈을 주었을 것이다. 사라진 짐배를 다시 운영할 수도 있었다. 그게 관 짜는 일보다는 벌이가 훨씬 나았을 게다. 그뿐인가, 거위를 키운 후 잡아서 겨울마다 모스크바로 보낼 수도 있었다. 거위 털만으로도 일 년에 십 루블은 너끈히 벌었을 텐데. 그런데 하품만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큰 손해였냐. 얼마나 큰 손해였느냐 말이다. "
page.29
롯실드의 바이올린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이다."
-빅토르위고, 레미제라블-
page 99, 결핍의 위로, 장일
그녀는 글을 쓴다. 온갖 색깔의 노트에다, 온갖 피로 만들어진 잉크로 글은 밤에 쓰는데,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 장을 보고, 아이를 씻기고, 아이의 학과 공부를 돌봐준 뒤이다. 그녀는 저녁상을 치운 뒤 같은 식탁에서 글을 쓴다. 밤늦도록 언어 속에 머무른다
내가 책을 읽는 건 고통이 제 자리를 찾게 하려는 거예요.라는 진정한 답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가난한 삶이 있으면 된다. 너무 가난해 아무도 원치 않는 삶. 신 혹은 사물들을 피난처로 삶는 삶이다. 그것에는 무(無)가 차고 넘친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수많은 문들로 이루어진, 자체의 풍문들로 이루어진 삶과는 길을 잃은 삶과는 반대되는 삶이다. 그런 삶들을 가지고는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다. 그런 삶에서는 말할 거리가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는 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구걸하는 이 여인의 순결한 얼굴을 보려면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밖에 없다. 저녁 시간 차곡차곡 쌓이는 그 글들을 바라볼밖에 어린아이의 잠 속에서 불어나는 엄청난 유산이다. page 83-91
작은 파티드레스. 숨겨진 삶. 크리스티앙 보행 지음
이 정도면 충분한 그 무엇이 되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세상은 언제나 올 수 있을까?!
page 159
이 정도면 충분한
조희선
[성령의 내적 증거의 효과] page 91
오직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그것이 인쳐질 때에야 비로소 성경이 우리에게 진지한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서 확증되지 않는 이상 말씀 그 자체가 우리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다는 것-도 이 사실들과 조금도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주님은 상호 간의 일종의 결속을 통해서 그의 말씀의 확실성을 하나로 묶어 놓으셨으므로, 성령께서 빛을 비추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실 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며, 또한 우리가 성령을 그 자신의 형상,
즉 말씀 속에서 인식할 때에, 우리가 혹 속임을 당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없이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성령을 보내사 그 말씀을 효력 있게 확증케 하심으로써 그의 일을 완성하고자 하신 것이다.
기독교강요 상 1559년 최종판.. 존칼빈(저)
영적인 삶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평범하고 가장 필요한 연습은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다. 이 연습은 영혼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기쁨을 맛보도록 훈련시켜 매 순간 하나님과 겸손한 사랑의 대화를 나누게 해 준다.
바쁘게 일하거나 영적인 일들을 묵상할 때, 심지어 정해진 기도시간에 소리 높여 기도할 때도, 가능한 자주 하던 일을 멈추고 짧게라도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잠시라도 그분을 맛보고 남몰래 그분을 만져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가 벌이는 모든 일에서 함께 하시고 우리 영혼의 중심 깊은 곳에 계심을 알자. 외부적 일을 할 때도, 심지어 기도하다가도 잠깐씩 멈춰 서 우리 영혼 안에 계신 그분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도움을 청하고 마음을 바치고 그분의 모든 자비와 긍휼에 감사를 드리자.
page 107~108 영적인 삶에 이르는데 필요한 연습
하나님의 임재연습, 로렌스형제, 사자와 어린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