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오뚝이들에게.
최근 들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아주 만약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면, 나는 정말 단순한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
그런 성향 있잖아. 애초에 생각이 적고, 직관적인 사람. 그리고 기억력도 안 좋은 사람.
넓고 깊게 여러 방면으로 생각하고, 사소한 것들을 다 기억하는 인생은 이번에 한 번 이면 족해.
난 다시 태어나면 나만 생각하고, 나만 알고 싶어. 주변에서 단순하다고, 이기적이라고 말해도 좋아.
난 생각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
사람은 누구나 '생각'을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데카르트가 말했듯,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로댕의 작품이 보여주듯,
'사람'과 '생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즉, 생각하는 행위는 인간의 본질, 인간이 가진 본성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난 생각하는 삶이 때로는 버겁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이 많은 삶'이 무척 버겁다.
생각이 많으면 행동을 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생각이란 특성상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새롭고 낯선 것은 되도록 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삶을 살아보니 삶을 더 나은 쪽으로 이끌어주는 건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것.
물론 행동 이전에 생각이 있다. 좋은 생각을 해야 좋은 행동을 한다.
하지만 좋은 생각도 생각으로만 끝나면 내 삶에 별 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행동을 해야 삶은 변한다.
이렇듯 생각 많은 사람들의 '행동'은 겹겹이 쌓인 수많은 생각들을 뚫고 나온 엄청난 것이다.
이렇게나 힘든 것이다.
생각 많은 사람의 행동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성향마다 장단점은 있지만 행동함에 있어서 생각이 많은 것은 유리하지 않다.
삶은 오뚝이처럼 살다가 가는 것 같다.
세상이 깔아놓은 걸림돌에 넘어지고,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엎어진다.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나서 걸어가야 한다.
이건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운명을 타고났든 다 똑같다.
넘어지지 않는 인생은 없다.
그래서 난 걸림돌 따위, 바람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의미 같은 것을 두지 않는 사람이 부럽다.
넘어지더라도 그곳에 '상처'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 사람이 부럽다.
"인생 다 이렇게 사는 거지 뭐"하며 나의 아픔에, 남에 아픔에 덤덤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누군가는 무심하다고 할지라도 그 무심함이 난 절실하게 부럽다.
내 아픔에, 타인의 아픔에, 세상에 아픔에 무심할수록 오뚝이는 빨리 일어설 수 있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잘 알고 있다.
난 이번생은 이미 무심한 인간으로 살아가기에는 글러먹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만 타고난 내 성품이 훌륭하고 좋은 게 아니다.
그저 난 민감한 사람이다.
내 아픔에, 타인의 아픔에, 세상에 아픔에 민감할 뿐이다.
나도 인간인지라 '나'란 생명체가 가장 먼저이지만, 그 아픔을 생각하면 오직 나만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 많은 오뚝이가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나, 너, 세상 생각까지 다 마쳐야 한다.
유난히도 좌절을 잦게 겪어야 했던 6월이다.
도전이라는 낯선 행위는 끊임없이 작고 큰 걸림돌을 내 앞길에 깔아 놓았다.
난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아프고, 또 아팠다.
아픔은 날 생각하게 했고, 그 생각에는 의미 덩어리가 생겨났고, 난 포기하고 싶었다.
이런 나를 부정하고 싶었다.
'난 왜 이렇게 생각이 많게 태어났는지. 뭘 보면 왜 이렇게 느끼는 게 많은지. 왜 그걸 또 글로 쓰고 싶은지. 난 왜 글을 업으로 삼고 싶은지.'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넘어진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생각 많은 오뚝이의 생각도 끝은 있다는 것.
생각의 끝에는 '어쩔 수 없다'라는 한 마디가 있었다.
그냥 살아야 한다.
태어난 대로 살아야 한다.
넘어져도 일어나서 다시 걸어야 한다.
단순한 오뚝이처럼 바로 훌훌 털고 일어나지는 못한다.
난 상처를 기억하고 복기하고 그제야 일어난다.
그게 나란 오뚝이다.
작가로 살기 딱 좋은 오뚝이.
천천히 그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말한다.
"그래, 이렇게 태어난 김에 작가로 살자.
쓰고 남기고, 다시 일어나는 작가 오뚝이로 살자."
아침부터 오후까지 비가 꾸준히 내리는 오늘같은 날은 생각, 감성 부자들에게는 파티와도 같은 날이죠.
안 그래도 많은 생각과 감성은 비오는 날 내리는 비처럼 주룩주룩 떨어지다 못해 흘러 넘치는 것 같아요.
아직 6월은 10일이나 남았지만, 지난 20일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저에게 6월의 20일은 유난히 잦은 넘어짐이 많았던 시간이었어요.
넘어지고 일어나는데에는 몇 배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왜 생겨먹기를 생각 많게 태어났는지 곧장 훌훌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꼭 그 넘어짐에 대해 생각하고 복기하고 그 의미를 정리하고 나서야 일어나더라고요.
이 과정은 제게 무척 고된 여정이었어요.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야기를 쓰는 사람으로서 완전한 영감 속의 여정이기도 하죠.
(물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고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저는 보이지 않는 생각을 많이 하게 태어났으니,
똑같이 보이지 않는 희망, 사랑과 같은 것들을 꼬옥 붙잡고 그것들로 저를 채우는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넘어져서 생긴 상처에 충분히 아파하고, 그 옆에 '희망, 사랑'이라는 단어를 써서 일어나는 방법.
그게 저한테는 맞는 방법인 것 같아요.
넘어져서 바로 일어나는 오뚝이면 좋겠지만,
저는 이슬기로 태어난 슬뚝이라서 제 방법대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려 합니다.
이 글을 읽는 이 세상에 모든 오뚝이 분들께 지금까지의 넘어짐과 일어남에 위로와 응원을 보냅니다.
그리고 우리 다른 오뚝이들 쳐다보지 말고, 나뚝이 답게 다시 일어나고, 나로서 나아가요!
-넘어짐 옆에 제 이야기가 일어날 수 있는 희망 같은 것을 드릴 수 있기를 바라며, 슬뚝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