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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앞, 운이 좋은 연인

너와 나의 이별이 쉬울 수 있던 이유

by 기록하는 슬기

여름의 끝자락, 습한 공기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운 어느 날이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교외의 한 카페로 향하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그는 내게 듣고 싶은 노래가 있냐고 물었다. 어떤 가수 이름도, 노래도 바로 떠오르지 않아 "음......." 소리를 내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네가 저번에 말한 그 노래 들을까?"라고 물어봤다. 그의 물음이 끝남과 동시에 차에서는 권진아의 '운이 좋았지'의 반주가 흘러나왔다.


(*이 노래는 한 여자가 자신의 이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래다. 절절하게 사랑한 기억도 없기에, 자신의 이별은 말 한마디에 쉽게 끝이 나버린다며 운이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겪은 모든 이별은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권진아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할 때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 노래 특히 가사가 정말 많이 공감가. 나도 저번에 비슷한 주제로 글을 썼던 적이 있어. 내 생각에는 오래 만난다고 더 좋은 인연도 아니고, 짧게 만났다고 나쁜 인연도 아닌 것 같아. 인연의 길이를 정할 수 있는 건 당사자들의 의지가 전부가 아니잖아.


돌아보면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의 이별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또.. 그 끝이 나에게는 다 다행이었어. 물론 아프긴 했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아픔이었어. 그렇게 아프고 나서 내가 성장한 걸 느꼈었거든. 무엇보다 '난 운이 좋다'라고 생각하고 나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도 조금은 덜 무섭더라고. '이 인연이 어떻게 끝날지는 몰라도 결국 나한텐 좋은 운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달까."


그의 손은 핸들을 잡고, 눈동자는 전방을 향해 있었지만 조용히 끄덕이는 고개와 내 얘기를 들을 때만 볼 수 있는 표정을 보니 그의 온몸은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보는 그 순간, 그 찰나 같은 순간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나는 이때가 떠오를 것 같아.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너와 나의 연이 다해서, 너와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때. 그때가 오면 이 순간이, 우리가 나눴던 대화가, 내가 너에게 했던 이 말이 다시 나에게 돌아올 것 같아.'



그런 날이 있다. 지금 이 순간의 대화가 훗날 언젠가 나에게 다시 돌아올 것 같은 날.




그는 언제부터 이별을 그렸을까. 그도 나와 같았을까. 우리가 이제 막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으로서 다가가기 시작하던 여름날, 그 여름날부터 나는 그와의 끝을 굳이 그려봤다. 그와 일상을 나누고 함께 하는 기억을 쌓아갈수록, 내가 많이 좋아할수록 내가 더 많이 힘들어질 것 같았다. 정확한 이유는 없다. 내 자리에 그의 자리를 더 내어주면 줄수록 나는 더 아플 것 같았다.


습기 머금은 무거운 공기가 점점 가벼워지는 가을이 왔을 때, 점점 더 나는 겁이 났다. 두려웠다. 사람 때문에, 감정 때문에 다시 휘청거리기 싫었다. 그렇다고 우리의 마지막을 말할 수는 없었다. 우리의 다름이 상처 주는 인연이라는 것을 일찍 알았음에도, 너와 나이기에 서로에게 줄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고 믿었다. 내가 받고 있던 상처, 네가 받고 있던 상처 따위는 그 특별함이 해결해 주리라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희망했다.


우리가 마지막을 말하던 그날, 너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너도 나에게 너의 자리를 내어줄수록 아팠구나. 너도 두려웠구나. 너도 사랑도, 이별도 모두 다 어려웠구나. 나와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앞으로는 자신의 삶에 넘치는 연애를 하고 싶지 않다는 너의 다짐을 내가 위태롭게 했구나. 안 그래도 다른 것들로 범람하는 너의 삶에 내가 큰 파도를 만들어냈구나.


우리는 아름다운 이별을 했다. 우리는 끝까지 서로에게 고마웠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그가 나를, 내가 그를, 우리는 서로를 너무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다행이었던 인연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네가 나를 너무 사랑하지 않아줘서.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하지 못하도록 곁을 내어주지 않아서. 난 운이 좋았다.



세상에 모든 '운'은 달콤하지만 않다. 운은 아프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 그것을 견뎌내야 진정 나에게 운으로 찾아온다.



운이 좋았던 나, 그리고 우리. 겨울의 끝자락, 우리는 우리라는 이름을 그만 쓰기로 했다.

몇 주 뒤면 세상 사람들이 '봄'이라고 부르는 계절이 시작된다.

뜨겁고, 습하고, 무거운 공기도

차갑고, 건조하고, 날카로운 공기도

모두 버텨낸 너와 나는 봄바람을 함께 맞이할 수 없다.


하나의 이기적인 욕심이 있다면, 곧 불어올 부드럽고 따뜻한 봄바람이 가끔은 널 불행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내가 너의 삶에서 너무 쉬운 다행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고맙기만 한 '운'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떠올리면 때론 후회했으면 좋겠다. 그 후회가 축축하고 끈적이는 미련과 같은 감정들과 섞여서 너의 마음 깊은 곳에 달라붙었으면 좋겠다. 지겹도록 사라지지 않았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아주 가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날 생각하면 슬픈 표정을 짓고 깊은 한숨을 쉬었으면 좋겠다.

날 생각하는 네가 불행했으면 좋겠다.









안녕하세요.

제 구독자님 중에는 제 사랑, 연애, 이별 글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도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오랜만에 사랑 글을 올려보네요. (정확히는 이별 글이네요. )

이 글은 최근에 쓴 글은 아니고, 몇 해전 이별을 겪고 썼던 글인데 조금 다듬어 이제야 올려봅니다.

최근에는 출판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서 사랑 에세이는 자주 쓰지 못했는데, 이제 다시 사랑을 포함한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찾아주시고,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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