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훈자 마을에서 보낸 가장 아름다웠던 그날 밤의 이야기
사모사 할아버지네 가게에서 떨어지지 않던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우리가 향한 곳은 메인 바자르 한가운데, ATM이 있는 곳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버스를 타러 가야 해서 오늘 그동안 머물렀던 숙소 대금도 미리 처리해야 했고, 다시 육로를 통해 인도로 넘어갈 예정이었기에 파키스탄 현금이 넉넉하게 필요했다. 그런데 평소에는 잘만 뽑히던 ATM가 말썽이다. 함께 가기로 한 J언니와 H오빠께 먼저 뽑으라고 양보를 했는데, 아마도 그 기계 안에 현찰이 얼마 없었던 모양이다. 언니 오빠가 돈을 뽑고 H언니와 내가 뽑으려고 하자 기계에서는 한참 동안 돈 세는 소리만 윙- 윙- 울려대더니 돈은 나오지 않고 카드만 다시 받아가라는 문구만 떴다. 일단 볼 일을 모두 본 J언니와 H오빠를 먼저 숙소로 보내드리고 H언니와 나는 다른 ATM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역시나 그곳에서도 텅 빈 기계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고, 당장 현금을 찾아야 하는데 막막했다. 그때 H언니와 내가 동시에 떠올린 사람은 우리의 친구 이삭이었다. 이삭이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걱정 말라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이삭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더니 10분만 기다리면 차있는 친구가 올 거라며, 차를 타고 알리아바드(훈자 동네와 가장 가까운 시내, 훈자 보다 조금 더 번화되었다.)로 가서 은행 ATM에서 돈을 뽑자고 했다.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차 있는 친구(알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도착했고 덕분에 순탄하게 현금을 찾을 수 있었다.
다시 차에 탄 우리 둘에게 이삭은 "오늘 너희 마지막 날이니까 내가 저녁 대접할게. 미리 다 생각해 놓은 곳이 있어."라고 말하며 알리에게 어느 식당 앞으로 가자고 했다. 그동안 이삭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아 H언니와 나는 저녁은 우리가 대접하고 싶다고 하니 이삭은 딱 잘라 말했다.
"그럴 순 없지. 너희는 내 손님이잖아. 나중에 너희를 찾아간 손님에게 베풀면 돼."
역시 훈자 사람들은 나와 생각 자체가 다르다. 이삭의 단호한 이 한마디를 듣고 언니와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탄 차는 어느 작은 식당 앞에 섰고, 이삭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양 손에 무거워 보이는 봉지 두 개를 들고 나왔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삭은 우리에게 말했다.
"이거 소고기 브리야니인데 포장해왔어. 내가 너네 데리고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거기 가서 이거 먹자."
"응? 거기가 어딘데? 음식 가져가서 먹어도 되는 곳이야..?"
"아, 비밀이야! 일단 가자!"
우리의 부풀어진 궁금한 마음을 안고 차는 컴컴한 도로 위를 달리고 달렸고, 작은 상점 몇 군데가 모여있는 곳에 드디어 정차했다. 이삭은 도착했다며 내리라고 했고 우리는 그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왜 이삭이 이 곳을 데려왔는지 딱 알 수 있었다. 바로 그곳은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였다. 이전에 우리가 '훈자 드 카페' 말고 다른 카페가 없냐고 물어봤던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우리가 떠나기 전 날 일부러 여기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이미 감동 한 움큼 먹고 H언니와 나는 같은 표정을 지으며 "뭐야.... 이삭........ 감동이야...."라는 말만 되뇌었다. 우리의 표정을 보고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은 이삭은 일단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이삭은 혼자 바쁘게 움직여 미리 포장해 온 음식을 그릇에 담아 테이블에 올려놓았고, 와인잔까지 챙겨 왔다. (알고 보니 가게 사장님과 이삭은 친한 사이었고, 미리 가게에 연락을 해서 양해를 구해놓았다고 한다.)
이삭과 이삭 친구 알리와 H언니와 나, 우리는 각자의 잔에 스프라이트를 따르고 잔을 들어 올렸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Thank you~"라고 외치며 잔을 부딪혔다. 이삭이 준비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며 그 순간만큼은 마지막 날임을 잠시 잊은 채 그 시간을 웃음으로 가득 채웠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차에 올라타 H언니와 나는 이제 숙소로 돌아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이삭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있어! 근데 어디로 갈지는 이번에도 비밀이야~"
우리가 탄 차는 가로등이라고는 정말 눈 씻고 찾아봐야 가끔 발견할 수 있는 시골길을 한참 달리고, 또 올랐다. 도착하고 보니 이삭이 비밀로 했던 그곳은 바로 '이글네스트'. 이전에 H언니와 일본인 부부와 함께 가려고 했던 곳인데 당일 아침에 갑작스럽게 위염이 도져서 나만 가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 이야기를 모두 알고 기억하고 있던 이삭은 "훈자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데리고 오고 싶었어."라고 내게 말했다. 이미 그 마음 자체는 감동 그 자체였지만 이글네스트는 보통 일출이나 일몰을 보러 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도 했고, 주변에는 희미한 불빛마저 찾아볼 수 없어서 H언니와 나는 한껏 겁을 먹고 지금 올라가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 이삭은 원래 이글네스트에 올라가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은 최고라면서 일단 가자고 했다.
H언니와 나는 휴대폰 불빛에 의지에 조심스레 짧은 언덕을 올라갔다. 올라갈 때는 어두워서 조금 무서웠지만 막상 높은 곳에서 보이는 훈자 마을이 내는 작은 불빛들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너무 어두워서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추억이라며 흔들리는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그리고는 돌바닥에 털썩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의 있는 별들을 바라봤다. 진한 검은 하늘에는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작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밤, 새벽, 별 성애자인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돌바닥에 무작정 누워버렸다. 차갑디 차가운 돌바닥 위에 누워서 바라보는 이글네스트의 밤하늘은 상상 이상으로 반짝거렸고, 또 낭만적이었다. 내가 누우니 하나, 둘 각각 자리를 잡고 돌바닥 위에 눕기 시작했다.
문득 이렇게 따뜻하고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준 이삭에게 너무도 고마웠다. 그리고 동시에 이 순간이 너무도 좋았다. 누워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삭이에게 나는 말했다.
"이삭.. 나 정말 이 순간이 그리울 것 같아."
또 시작되었다. 여행의 순간이든 일상의 어느 순간이든 진심으로 '좋다..'라고 느끼는 순간 곧바로 이별을 걱정하는 습관, 그리고 벌써부터 그 순간 속 함께 있던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나의 습관.
사실 훈자에서 하루, 이틀 시간을 보내면서 훈자가 좋아질수록 나는 미리 걱정을 해왔다. 훈자를 떠나는 날을, 훈자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별하는 날을. 내일 이 시간을 떠올려보니 이슬라마바드 어느 도로 위의 달리는 버스 안에서의 내가 보여 순간 아찔해졌다. 내일이면 당장 이 사람들을 못 본다는 생각에 두 눈에 담기는 반짝이는 밤하늘이 조금은 슬프게 보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우리 넷은 누워서 말도 안 되는 농담도 해가며, 또 진지한 각자의 이야기를 하며 그 순간을 가득 매웠다. 이제는 정말 다시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차를 타고 이삭네 레스토랑에서 사진 한 장씩만 찍고 헤어진다는 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 넷은 짜이까지 한 잔 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중간 울컥한 감정 때문에 H언니는 여러 번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그런 언니를 보고 이삭은 괜스레 더욱 오버하면서 언니를 따라 하며 놀렸다. 그리고 너무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H언니는 마지막 이별의 인사를 나누며 이삭과 포옹을 하다가 참았던 눈물샘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때 이삭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이삭은 늘 장난기 가득하고 또 밝았던 친구였는데.. 그리고 이삭은 우리에게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
"훈자에서 많은 여행자들과 친구가 되고 또 이별을 해왔지만 헤어질 때 나를 울게 만든 건 H와 슬기! 너희가 처음이야.. 다 너희 때문이야!!"
숙소로 걸어가는 길, H언니와 나는 자꾸만 울컥해지는 마음을 겨우겨우 진정시켰다. 숙소 리셉션에 가서 미리 숙소 값을 지불하고 내일 일찍 떠나니 숙소 가족들과도 미리 인사를 나눴다. 이제는 정말 이곳을 떠나는 게 실감이 났다. 헛헛한 마음으로 너무도 익숙해진 우리 방문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리 방문 문고리에 어떤 봉지 하나가 걸려있었다. 봉지를 꺼내 안에 내용물을 보니 배 여러 개가 들어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의 훈자 첫 동행 중 할아버지 한 분이셨던 구루 할아버지께서 우리가 내일 떠나는 것을 아시고는 인사를 하러 오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계속 기다리시다가 우리가 늦은 시간까지 오지 않자 배가 들어있는 봉지를 문에 걸어두고 가셨던 것이다. 이제는 조금 진정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까지 훈자에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따뜻한 공격이 들어오니.
훈자가 뭐길래. 사람 마음을 이렇게 녹여버리고 끝까지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만드는지. 그와 동시에 이미 훈자를 여행하고 온 분들이 하나같이 했던 그 말이 문득 떠올랐다.
'훈자는 들어가는 길도 힘들지만 나가는 길이 더욱 힘들다는 말.'
130일 넘게 긴 여행을 하면서 어떤 여행지를 떠나기 전 날, 단순히 "내일 떠나기 싫다.."가 아닌 "여기 언제 다시 오지?"라고 고민하게 만드는 곳은 훈자가 처음이었다.
짐 정리를 모두 끝내고 잠이 쉽사리 오지 않는 새벽, 침대에 누워 컴컴한 천장을 바라본다. 어두운 강물처럼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천천히 하나, 둘 유유히 흘러간다. 내일이 되고, 그다음 날이 되면 꼭 꿈꾼 것처럼 나는 이곳과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이렇게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기억하고 또 그리워하겠지. 세월이 흐르면서 훈자에서의 기억과 추억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받은 진심과 따뜻함은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훈자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언젠가 다시 꼭 훈자를 찾아오겠다는 그 약속도 잊지 않고 지키고 싶다. 이렇게 훈자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길고 긴 새벽이 흘러가고 있다.
<다음 편은 '훈자가 뭐길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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