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질로만 요리가 되는 마법
요리에 관한 글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마음이 편해져서 이다.
장르적 특성상 요리에 관한 글은 예리하고 날 선 마음보다는 여유롭고 포근한 마음으로 쓰게 되어, 무언가 쓰고 싶은데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쓰고 싶을 때 종종 요리에 관한 글로 갈증을 해소한다. 요리 실력이 딱히 출중하지 않아도 다양한 시판 소스(sauce)가 있는 한 요리를 못해 글을 쓰지 못할 걱정은 없다.
'전통이 있는 레스토랑 주방에는 엄격한 위계가 있다. (중략) 수석 요리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직급은 메인 요리를 만드는 '소시에르(Saucier)'다. 소시에르란 '소스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요리에서 중요한 것이 소스였다는 것을 전통적으로도 인정했다는 의미다.'-은상, 결국 소스 맛
소스는 중요하다.
근래 들어 날이 조금 시원했고 몸이 조금 허한 날이었다. 따뜻하고 건강한 음식이 먹고 싶었고 시작은 토마토였다. 냉장고에 있는 요리용 토마토를 떠올리자 그냥 잘라먹으면 빈속에 너무 차갑고 더 허기질 것 같아 일단 뭉근하게 끓이기로 했다. 토마토를 꺼내려고 냉장고를 보니 양배추, 양파, 당근, 아스파라거스 등의 채소가 있었고, 그걸 모두 묶을 수 있는 '토마토 스튜'가 스쳐갔다. 검색한 레시피의 '올리브유에 채소를 볶고...'로 시작되는 문장을 보자 순간 귀찮아져, 어찌 됐던 물을 붓고 그 안에 채소들을 모두 잘라서 투하해 일단 끓이기로 했다. 끓이다 보니 처음 넣었던 물이 졸아들어 많이 없어졌고, 물을 새로 부으려다 문득 냉장고에 있는 토마토 야채 주스가 떠올랐다. 우리나라의 케첩이 연상되는 달달한 맛의 토마토 주스와 달리 얼마 전에 산 이곳의 토마토 야채 주스는 짠맛에 가까워 주스로 먹기에 익숙한 맛이 아니라 일단 냉장고에 넣었는데 왠지 그걸 지금 쓰면 좋을 것 같았다. 토마토 채소 주스를 육수삼아 손질한 채소에 붓고 다시 끓였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어느덧 채소는 푹 익어 부드러운 상태가 되어있었다. 마지막으로 블랙 올리브를 몇 알 넣고 남아있던 약간의 토마토 파스타 소스를 넣어 스튜를 완성했다. 얼마 전에 여유 있게 사둔 샌드위치가 다행히 아직 있었고, 거기에 까방베르 치즈 한 조각을 곁들여 스튜를 부어주니 보기에 제법 멀쩡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맛을 보니 아주 심심하고 밍밍해 우리 집에서는 딱 나만 좋아할 마이너 한 맛의 맞춤 스튜가 완성되었다.
소스는 중요하다. 재료를 손질해 만들어진 소스의 도움을 받아 완성하는 요리가 대부분인 나로서는 이것저것 필요한 양념을 감으로 휙휙 넣어서 요리를 창조하는 분들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오래전에 이연복 셰프가 요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화려한 웍질로 센 불에서 현란하게 요리를 하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어떤 요리들은 셰프가 레시피를 공유해도 따라 할 수가 없으니 비법 유출의 우려가 없겠다는 것을.
다행히 일상의 요리는 정답이 없다. 재료+(필요에 따라) 불+약간의 양념이면 어찌 됐던 뭔가 만들어는 진다. 재료의 기본 맛이라는 게 있으니 간이 과하지 않으면 크게 망칠일은 없고, 그러다 보면 오늘처럼 맞춤 요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모처럼 날이 시원해서 아침 달리기를 했고, 계획했던 일 하나를 끝냈으며, 요리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순탄한 기운이 흐르는 오전이었다. 이제 글을 잘 쓰는 일만 남았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