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급법을 파헤쳐라
자대로 전입한 지 얼마 안 되어 주어진 가장 큰 임무는 교관 연구강의였다. 군에서 하는 교육에는 병기본교육과 주특기 교육이 있는데, 우리 부대는 탄약부대였기에 병기본 교육은 구급법과 경계교육을 주특기 교육은 탄약 관련 교육을 실시했다. 평시에 탄약 중대는 일과시간 내내 탄약고에서 탄약관리, 탄약보급, 탄약 정비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므로 주특기 교육을 따로 실시하지는 않았고 실제는 병기본 교육만 진행했다. 병기본은 소대장들이 교관업무를 담당했고 나는 구급법 교관으로 편성되었다. 실제 교육도 긴장되는 일이지만 그에 앞서 더 큰 산은 교관 연구강의였다. 부대에서 대대적으로 하는 큰 행사였고, 우수자로 선정되면 상급기관(탄약사령부)에서 진행하는 경연대회까지 참석해야 하는 탄약사령부 예하의 큰 행사였다. 모든 교관들의 교관 준비상태를 점검하지만 어느 정도는 형식적이었고, 중대 대표로 선정된 간부의 교관 연구강의가 핵심이었다. 대부분은 초임간부가 중대 대표로 선정되어 연구강의 준비를 했고, 갓 소위였고 중대의 유일한 초임간부였던 나는 당연한 수순으로 중대 대표로 선정되어 연구강의를 준비하게 되었다.
연구강의 준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일주일 정도 일과에 편성되지 않고 중대에서는 여건을 보장해주는데, 심적으로 많은 부담이 따랐다. 상을 받는 것은 바라지 않았지만 명색이 중대 대표이니만큼 체면 유지는 해야 할 것 같아 어깨가 무거웠다. 경연대회라 하면 가르치는 실력은 기본이고 뭔가 시선을 압도할만한 한방이 필요할 것인데 창의적 교보재, 강사의 입담 등등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해보니 조교들을 동원한 상황극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 여겨졌다. 함께 참여할 인원을 물색해 곧 연습에 들어갔다. 조교들은 노련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극하는 것도 거리낌 없었던 성격의 아이들이라 문제없이 강의를 준비할 수 있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상황 설정을 '대퇴부 골절'로 하고 그에 따른 골절 상황 재연부터 구조요청 과정 붕대법 응급처치까지 실시하며 설명을 곁들여 강의하고 교보재와 강의 자료를 준비했다. 유려한 말솜씨가 없던 나는 임기응변은 애초에 포기하고 강의 내용을 철저하게 숙지하고 또 숙지했다.
드디어 연구강의 당일이 되었다. 다행히 준비한 만큼은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3등을 해서 부대 내의 표창도 받았고 함께해준 조교들에게도 보상이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특출 나게 잘하지는 않은 덕분에 부대 대표로 선발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참고로 부대 대표로 선발된 인원은 꽤 오랜 시간 부대 차원의 지원을 받으며 연구강의를 준비해서 탄약 사령부에서 개최하는 대회에 출마해야 한다.) 연구강의를 끝으로 마무리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연구강의는 단지 1회성 행사였다. 이제는 본 게임인 구급법 교관업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월 1회 정도 주기적으로 진행되는 본 강의가 부담되었다. 정말이지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적성에는 잘 맞지 않는 일이었다. 성격상 교육을 앞둔 며칠 전부터 교육에 대한 부담감이 마음속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었고, 당시 부대의 유일한 여군 소대장이었고 초임장교였던 나를 예의 주시하던 부대 교육담당 정작과장님의 순찰도 부담되었다. 다행히 병기본은 중대원들이 이미 훈련소에서 교육을 받고 오기에 실습 위주로 강의가 진행되었고, 그마저도 부대 업무가 늘 바쁘고 훈련이나 당면과제 등의 급한 업무도 많았기에 느긋하게 교육을 진행할 시간이 거의 없기에 이따금 몇 달에 한 번씩 진행하게 되며 조금씩 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고 신임 간부들이 전입 오며 중대 대표 교관 연구강의 임무는 그들에게로 넘어갔고 비로소 나는 여유롭게 그 시간을 관망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