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면 사는 날은 두 유형으로 나뉜다. 엄청나게 힘든 날과 덜 힘든 날. (그 순간은 분명히 있었던 좋은 날에 대한 기억은 증발해 있다). 앞이 좀처럼 예측되지 않고 막막한 날. 그럼에도 지난날을 보면 그런 날을 넘겼다. 분명.
돌아보니 언제나 적용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주 약간은 효과가 있던 몇 가지 패턴은 있었다.
우선은 힘듦을 넘은 사람들에 관한 단상이다. 이때의 누군가는 피상적인 이미지가 아닌 퍽 구체적인 이미지를 지닌 누군가였다. 마음 한 부분을 닮고 싶었거나, 힘을 주는 인물의 어느 한 시절을 가끔 떠올려본다. 그가 살아낸 한때의 시간을. 건재한 그의 훗날을 알기에 그 시절 그의 마음을 상상하며 그 속에 들어가 막연하게 그 시절을 감각하며 나의 상황을 이겨낼 에너지를 끌어올 때가 있다.
가끔은 상담이 있다. 어쩌면 내게 상담은 답을 찾기보다는(모두에게 적용되는 정답이란 없으므로) 어딘가에 터질 것 같은 마음을 털어놓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힘듦의 유형에 따라 떠오르는 인물들에게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일부 사실은 덮어둔 채 우회해서 마음을 털어놓았다. 친한 이들에게 혹은 그리 친분은 없어도 진실한 이들에게 마음을 털어놓던 시간들.
그렇다면 엄마는? 애석하게도 그 상담 대상에 대체로 엄마는 없었다. 엄마는 지혜롭지만, 좋은 상담 대상자는 아니었다.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리고 나의 엄마이기에 객관성을 잃을 수 있는 필연적 한계가 있어서. 그리고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고 잘 지냄을 연출하고 싶어서 속 깊은 상담 상대로는 배제해 왔다. 그런 엄마에게 밤늦게 전화를 했다. 담담한 어조로 오갔던 긴 대화. 대화는 뜻밖이었다. 엄마는 전혀 틀에 박힌 답을 내놓지 않았다. 예상은 빗나갔다. 엄마는 나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격하게 공감하고, 조심스럽게 선을 넘지 않으며 본인의 견해를 덧붙였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은 영원한 내 편이라고. 울컥할뻔했다. 역시 상담은 어떻게든 성과가 따른다.
다음은 시간의 흐름을 견디는 일이다. 잠이 안 오고 마음이 터질 것 같은 막막한 마음. 그럼에도 다음날은 온다. 그리고 아무런 달라진 상황이 없음에도 막막함이 어제보다는 희석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분명 어제보다 아주 미세한 희망이라도 마음에 스며있는 느낌. 그렇게 조금씩 시간의 흐름을 견뎌본다.
마지막은 오늘 아침 달리기 길에서 머리를 스쳤다. 그것은 어쩌면 나 자체가 되어야 할 것 같다고. 건강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을 좋아했고, 끌렸고, 종종 동경해 왔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그런 사람 자체가 좋았다. 웃음에서 목소리에서 행동에서 밝음이 넘치는, 나는 갖고 있지 못하고 어쩌면 앞으로도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밝음을 가진 사람이. 근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에게 내가 연출하는 그런 류의 퍼포먼스가 필요할까. 그것은 단지 동경 아닐까. 사실 나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굳건한 내면과 단단한 심지 아닐까. 건강한 퍼포먼스는 연출할 수 없어도(그러지 못한 사람이 일부러 그렇게 하면 퍼포먼스 같아서) 단단한 내면이 있다면 주어진 상황들을. 또 다가올 날들을 나의 방법으로 넘을 수 있지 않을까. 강인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여차여차해서 간신히 라도. 어쨌든 넘으면 되는 거니깐. 그래서 미세하게나마 강인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눈빛 속 굳은 심지 한 가닥쯤은 있는.
바라본다. 그럼에도 이제껏 나열한 힘듦을 뛰어넘는 방법이 먹히지 않는 그런 류의 힘듦은 오지 않기를. 뛰어넘는 법을 아는 척 하지만 진실은 힘듦은 언제나 낯설기에.
그리고 바라본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결기는 깨지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