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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눈물버튼이 되는 시간

by 수진

기질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달라진 듯 위장하고 연기를 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잘 변하지 않는다. 드라이한 사람은 아이를 키워도 드라이한 것이다.

그럼에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아도 무언가 달라지긴 달라진다. 그건 분명하다. 적당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눈물버튼이 하나 생긴다고 해야 할까.


저녁이 되어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더니 비가 왔다. 자려고 누운 아이가 물었다.

- 내일 비 많이 오면 학교 못 가?

- 아니, 학교에서 연락 오기 전에는 학교 가는 거야.

- 그럼 나 집에 올 때도 천둥 치고 비 오면 어떻게 해?

- 잠깐 시간 내서 데리러 갈게. 얼른 자.

다음날 비는 멎었지만 여전히 날은 흐렸고, 아이는 학교 가는 길에 재차 데리러 오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비가 안 올 것 같아서 그러마 했지만, 날은 흐려졌고 출근 시간은 다가왔다. 일하다가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울상황은 아닌 것 같아 출근 전에 미리 아이 학교에 들러 우산함에 우산을 꽂아두고, 아이 신발에 쪽지를 넣고 왔다. 데리러 갈 수 없어 미안하다고 우산 쓰고 조심히 오라고.

일을 하고 있는데 하교 시간이 되었고, 아이가 나타났다. 비에 젖은 채로. 아이는 신발에 넣어둔 쪽지는 확인했지만 우산함은 확인하지 못해 비를 맞고 왔다.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조용히 모자를 눌러쓰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눈물을 참고 있다는 것을. 어느덧 아이는 혼자 눈물을 삼킬 만큼 자라 있었고, 그 모습은 울며 떼쓰는 모습보다(이럴 때는 화가 났다;) 안쓰러웠다. 이제 아이는 비를 맞아서 슬픈 게 아니라 그 이상의 감정까지 알아챌 나이가 되었나 보다.

분명한 것은 그 순간 나의 마음에도 어떠한 감정이 함께 고였다. 바로 터져버리지 않아도, 무언가 작은 일이라도 계기가 되면 확 터져버릴 것 같은 감정이.

눈물버튼. 명확한 인과관계도 메커니즘도 모르겠고, 여전히 나는 드라이한 육아를 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로 인해 내게는 눈물버튼과 유사한 것이 하나 생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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